사물은 보이지 않는 깊이가 아니라 그 표면으로 말하니, 사물의 표면이 말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라. 깊이라는 잣대로 사물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깊이란 실로 추상과 모호함, 혹은 거짓 형이상학의 변성에 지나지 않는다. 깊이의 의미심장한 검증되지 않은 추측이고 섣부른 예단이다. (4-5쪽)
표면은 깊이의 부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유나 인격이 깊이를 머금지 못할 때 말과 행동은 들뜸, 허장성세, 수박 겉핥기, 경박함으로 흘러간다. 우리 사회는 때때로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들뜬 분위기에 감싸여 있는 듯하다. 감정이 들떠 있는 사람은 사물이건 무엇이건 고요히 응시하지 않는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느끼고 판단함으로써 자주 실수하고 낭패를 본다. (35쪽)
산다는 것은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니고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게 본질이다. 모든 빨래는 사람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불가역적 시간의 포획물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 불가역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것은 낡아지고, 깨끗한 것은 더러워진다. (41쪽)
선글라스는 일종의 가면이다.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자는 그 뒤로 숨는다. 선글라스는 눈빛과 눈동자를, 그리고 내면 심리를 가린다. 선글라스를 끼고 난 뒤 깊은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73쪽)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자극해서 제 잇속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종말론을 유포한다. 나쁜 종말론은 ‘나‘의 개별화된 죽음을 세계와 함께 자살하는 것으로 바꾼다. 세계의 종말이란 없다. 단지 ‘나‘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종말의 순간에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욕망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우글우글하다. 종말론자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뜨거운 물이 넘치는 욕조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다. 욕조 목욕이 주는 안락과 평화 속에서 관대해지는 것. 그것이 엉뚱한 종말론에의 유혹에서 우리를 구제한다. (91쪽)
가죽소파가 그 자체로 하나의 신체이긴 하지만 만짐과 만져짐 사이에는 어떤 정념도 생기지 않는다. 신체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기에 순수한 자기감응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과 우리 사이에 어떤 형태의 가학증과 피학증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가죽소파의 현전은 수동적 타성태로 굳어지는 ‘있음‘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가죽소파 위에 몸뚱이를 가로 눕히고 주말 휴일을 빈둥러길 때 우리는 가죽소파와 몸뚱이가 하나로 연결된 신체로 변하는 사태를 겪는다. (111쪽)
사진의 본질은 더도 덜도 아닌 멈춤, 시간의 얼어붙음, 죽음이다. 사진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현실의 시간에서 뒷걸음질 쳐서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이때 과거란 다시 되풀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이다. 과연 죽음뿐일까? 사진은 시간과 존재의 정지라는 맥락에서 죽음이다. 동시에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존재의 회귀로서의 생생한 삶을 겪게 한다. (146쪽)
정글은 자연이 아니라 일종의 무대장치일 뿐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스펙터클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안전한 곳에서 위험한 정글과 그 정글이 만드는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주체다. 이 스펙터클을 보면서 이것에 한없이 길들여지는 우리들. 이제 가려져 있던 진실을 폭로하자! 우리가 텔레비전의 주인이 아니라 거꾸로 텔레비전이 우리를 포확하고 길들이는 권력의 대리인이자 능수능란한 조련사였다는 것을! (161쪽)
신문에서 리얼리티는 중요하게 취할 만한 요소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간신문을 읽는 이 시간에 서리는 유유자적, 햇빛의 기쁨, 멜랑콜리의 안온함이다. 조간신문은 멜랑콜리의 안온함으로 우리의 들끎는 욕망을 다독인다. 조간신문을 읽는 이 시간에 꽃잎 내려앉듯 쌓이는 정밀한 고요와 잔잔한 기쁨을 속속들이 맛보려 한다. (211쪽)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서잉 만든 견고성들이 어떻게 해체되면서 액체화하고, 세계가 어떻게 ‘고형적‘ 국면에서 ‘유동하는‘ 국면으로 바뀌는가를 조목조목 짚는다. 땅이 물렁물렁해지면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지유주의적 지구화, 국제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 통제 불가능한 시장의 변덕, 국수주의, 테러리즘의 위험성들로 사회적 토대가 물렁물렁해진다. 따잉 언제 푹 꺼질지, 그 지형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세계의 유동성이 증가하면서 개인들의 삶 역시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의 영역으로 떠밀린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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