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는 자신조차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써야 일기가 된다. 일기를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백 년 뒤에 누군가 읽는다고 생각했다면 카프카도 이처럼 두꺼운 일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프카 역시 자신의 일기를 지우곤 했는데 그건 일기의 목적이 쓰는 행위에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17쪽)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온 타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사실 (생략). (38쪽)
그러니까 이 현실은 우리가 예전의 삶을 반복한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탱한 기본 원리에서 우리가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니, 이 반복은 스스로 적폐가 되는 반복이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까? 국가는 국가를 개조할 수 있을까? 책임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63쪽)
말하자면 없어진 뒤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물이나 공기 같은 것. 없어지면 우리에게 치명적인 것. 그러나 있을 때는 그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112쪽)
거울 속에 늙은 얼굴이 있다고 해서 그 거울이 그를 늙게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세계는 그 거울과 같다. 세계는 늘 그대로 거기 있다. 나빠지는 게 있다면 그 세계에 비친 나의 모습일 것이다. (143쪽)
자서전이든 전기든 인생담의 경제학은 다음과 같다. 경제 주체가 이윤을 추구하듯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체는 의미를 추구한다. 이 말은 곧 이야기를 들려줄 때 우리는 개별적인 사건들을 인과의 사슬로 연결한다는 뜻이다. (208쪽)
불안이 너무 많이 사랑하는 자의 것이어서 환멸을 낳는다면, 우울은 아무런 이유 없이 타자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접한 사람의 것이어서 체념을 발생시킨다. (266쪽)
우리의 삶은 우리를 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 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쉼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 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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