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나를 그린다
도가미 히로마사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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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불이선란’, 19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55.0×31.1㎝, 개인 소장.


우연히, 추사 김정희(1785~1856)의 난 그림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불이선란'이라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감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어떤 향기와 기운이 느껴졌었다. 서화 감상의 안목이 없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은은한 향기와 생생한 기운. 역시 명작이었다. 뛰어난 감상가이기도 했던 추사. 그는 서화 감상에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금강역사 같은 무서운 눈,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 같은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금강안이라고 불린 추사.

소설, 《선은 나를 그린다》는 수묵화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초기 금강안의 안목을 가진 청년도 그린다. 추사와 같은 그의 치유와 성장을.

'"자넨 좋은 안목과 심성을 가지고 있어. 그게 바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지."' -123쪽.

'"그림은, 수묵화는 내 생각 바깥에 있는 세상을 가르쳐줬어. 내가 뭘 느끼는지를 전해줬어."' -357쪽.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오야마 소스케. 홀로 상실감 속에서 살던 그는 대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전시회장의 짐 운반 아르바이트에 간다. 그곳에서 그는 어느 노인을 만난다. 그 노인은 그에게 여러 감상평을 듣고, 좋아한다. 그리고 그를 애제자로 삼겠다고 한다. 그 노인은 일본 수묵화의 거장 시노다 고잔이었다. 거장의 애제자. 기연이었다. 아오야마 소스케도 놀라지만, 시노다 고잔의 소녀이자 젊은 수묵화가인 지아키도 놀란다. 그리고 그녀는 반발한다. 수묵화와 아무 접점이 없던 그. 그녀는 그런 그와 내년 '고잔상'을 두고 경쟁하자고 한다. '고잔상'은 일본 수묵화 세계의 상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상이다.

소스케는 수묵화를 처음 배우며, 마음을 그리고, 생명을 그렸다. 그렇게 회복하고, 발돋움하게 된다. 새로운 세상, 새 느낌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지아키도 소스케와 함께 하며, 더욱 나아가게 되고.

고잔은 '수묵의 본질은 즐거움'(68쪽)이라고 소스케에게 가르친다. '재능이나 감각은 그림을 즐기느냐 아니냐에 비하면 특별한 게 아니다'(174쪽)라고 한다. 또, '수묵화는 삼라만상을 그리는 그림'(215쪽)이라고 하며, '현상이란 바깥에만 존재하는 걸까? 마음속에는 우주가 없을까?'(251~216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216쪽)고 한다. 이런 고수의 가르침을 받으며, 소스케는 빠르게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그를 보며, 지아키도 자신의 부족한 것을 알게 되고.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

금강안이었던 추사는 '문자향 서권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고잔의 가르침도 결국에는 이것이 아닐까. 선각자들이 남긴 글. 즉, 문자와 책 같은 가르침을 통해 체화된 깨달음. 그렇게 내면에 담긴 깊은 깨달음의 향기와 기운. 그것이 선이 되어 나오는 것이 수묵화라고. 그렇기에 수묵화가 즐거움이 되는 것이라고. 그 즐거움 속에서 나오는 향기와 기운이 생명이고, 삶이라고. 그래서 '수묵화가 마음과 생명을 그리는 그림'(381쪽)이고, '수묵화가 선의 예술이라면 선은 삶의 방식 그 자체'(381~382쪽)라고. 결국, '선은 나를 그리고 있는 것'(384쪽)이 된다고.

소설, 《선은 나를 그린다》는 수묵화의 세계에 등장한 한 청년의 성장 소설이다. 그런데, 노인 고수들과 청년 주인공의 기연. 엄청난 성장으로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게 되는 그. 결국, 아픈 과거를 딛고 세상에서 우뚝 서는 그. 그리고 절세미인과 그의 사랑. 이런 그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의 주인공과 닮았다. 그렇지만, 수묵화라는 참신한 소재로 작가의 깊은 뜻을 잘 그렸음은 분명하다. 그렇게 이 책이 그린 그림에 생명의 향기와 삶의 기운이 서려 있음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덧붙이는 말.

하나. 이 책의 지은이 도가미 히로마사는 현직 수묵화가라고 한다.

둘. 이 책은 제59회 고단샤 메피스토상 수상, 2020년 아마존재팬 랭킹 1위, 독서미터 ‘읽고 싶은 책’ 랭킹 1위, ‘왕의 브런치’ 선정 2019년 올해의 책 대상, 2020년 일본 서점대상 3위라고 한다.

셋. 우리나라에 이 소설이 원작인 만화와 이 책이 동시에 발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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