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
천종호 지음 / 우리학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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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터져 나오는 청소년 범죄, 수위는 점점 높아져 흉포함이 상상을 초월한다. 도저히 어린 아이들이 저지른 짓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을 접하면서 우리나라의 청소년 범죄의 현주소를 되짚어 보게 한다. 최근 청소년 범죄가 급증하고 흉포화 되자 소년법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그런 분위기에서 천종호 판사의 강연회가 열렸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를 통해 또는 유투브 동영상으로 천종호 판사의 호통 재판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기에 무척이나 기대하였던 강연이었다. 직접 본 천종호 판사님은 권위적인 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소탈한 모습의 이웃집 아저씨 같은 포근한 인상이었다.

 


이 책 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은 소년 재판을 8년 하고 떠나가는 천종호 판사의 마지막 소회가 담겨있다. 비행 청소년들을 향한 호통으로 법정을 눈물바다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소년 재판을 하며 청소년들의 재판 절차의 문제, 청소년들에게 미흡하기만 한 제도적 모순들을 묵도하며 그가 깨달았던 것은 비행 청소년들은 따뜻한 말 한 마디에도 바르게 자란다는 것이었다. 국가나 사회가 비행청소년으로 낙인을 찍지만 천종호 판사의 눈에 비친 그들은 가정에서도 법정에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여리고 어린 소년일 뿐이었다.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소년재판을 끝내야 하는 법정에서 아이들이 다시는 비행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호통으로 이어졌다. 죄의 유무를 따져 처벌하는 판사가아닌 아이들이 잘 자라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환경을 조성해주며 품행 교정을 가능하게끔 하며 비행과 범죄를 벗어나 자립적인 사회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소년 법정의 판사가 되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판사이다. 호통을 통해서라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생각할 기회를 갖게 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가 있으면 해결할 수 있도록 관계 회복의 단초를 제공하며 피해자에 대한 피해회복까지 배려한, 삶의 안내자로서 아이들을 비롯한 소송 관계자들이 제자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 호통은 천종호 판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호소였다.

 

나의 호통은 법정에 선 소년들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기를 바라는 내 나름의 간절하고 간곡한 호소이다.”


 

천종호 판사는 무척 가난했다. 한국 전쟁 때 피란민이 거주하는 판자촌이 즐비한 부산의 아미동 까치고개에 있는 빈민가가 그의 고향이다. 아홉 식구가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을 갔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공부였다. 가난으로 인해 비행에 빠지는 청소년들의 슬픔과 아픔을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가난으로 점철되었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는 말처럼 비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은 가족해체로 제도 밖에서 방황하는 소외계층의 자녀들이다. 법정에서 선 소년들에게 천종호 판사가 주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희망, 가난한 삶에 드리워진 암울의 장막을 거두고 희망이라는 빛을 따라 일어서는 용기였다.

 


청소년 범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비난은 모두 비행청소년들을 향한다. 하지만, 천종호 판사는 그 아이들을 비난하기 전에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을 제공한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결의 실마리 역시도 어른에게 있다. 아이들의 비행을 부추기는 온라인 중독과 사이버 폭력은 개인과 가족을 넘어 사회와 함께 나서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점점 증가하는 흉포화 되는 청소년 범죄로 인해 소년법이 폐지된다면 모든 사건을 형사재판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만약 개정안이 받아들여져 형법상 비 범죄연령이 10세까지 낮아지게 되면 초등학생 5,6학년 학생도 형사법정에 세워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들은 전과자라는 딱지가 붙게 되고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여야 하며 소년원은 폐지되고 소년교도소를 만들어야 한다. 허나 우리가 알고 있는 청소년 범죄는 전체의 5퍼센트 안팎이고, 더 나아가 잔혹하고 엽기적인 사건은 전체의 1퍼처센트 미만일 뿐이다. 그런 이들을 엄벌하기 위해 소년법을 폐지하면 나머지 95퍼센트의 사건도 형법을 적용해야 하며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도 모두 전과자가 된다.

 

세상 어디에도 혼자 크는 아이는 없다. 아이를 둘러싼 환경은 모두 어른들이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그 해결의 실마리도 어른들이 풀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천종호 판사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른으로 살아가며 아이들 문제에 무관심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지금의 교육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아이들의 영역이 있다. 그건 사춘기라고도 하여 문제가 툭 불거지기도 하며, 내 아이는 괜찮을 것이라는 착각이 빚어내는 과잉보호의 늪이다. 가정에서조차 케어가 되지 않는 아이들도 많고 학교내에서는 왕따와 폭력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어른들의 암묵적인 동의와 무관심으로 비행 청소년들은 사회 밖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에서 법적인 처벌만이 답은 아닌 것 같다. ‘호통하나로 아이들의 마음으로 돌려놓았듯이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가 아이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비행 청소년이 아닌 사랑이 필요한 아이로, 문제아가 아닌 부모의 맘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어른의 몫을 해야겠다.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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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사람인가
발타자르 그라시안 &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 & 장 드 라 브뤼예르 지음, 한상복 엮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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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인생 1막은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즐겨라.

고전에 힘입어 우리는 더 깊이 있고 참다운 인간이 된다.

인생 2막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겨라.

조물주는 우리 모두에게 재능을 골고루 나누어주었고,

때로는 탁월한 재능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에게서 다양한 지식을 얻어라.

인생 3막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보내라

행복한 철학자가 되는 것만큼 좋은 인생은 없다. -그라시안

 

책선물을 받고는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인생책이라 할 수 있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와 비슷한 맥락의 책이지만한상복 역자가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와 장 드 라 브뤼예르의 잠언을 틀로 삼아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읽다보면 무척 공감 가는 이야기들이 많다오히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물질의 세례를 받고 있지만정작 자본주의의 모순과 부조리함은 인간의 감성과 정서를 더욱 강팍하게 만들고 있는 주범인지도 모른다.

 

라 로슈푸코는 프랑스 대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정치적 책략에 휘말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루이 13세 시절왕비의 편을 들어 권력자 재상을 타도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투옥되는가 하면 루이 14세 때에는 실세 마자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두 차례의 큰 부상을 입고 은퇴해 살롱헤서 독서와 대화를 나누며 제2의 인생을 살았다그는 우리의 미덕은 위장된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일지언정지식과 덕행을 쌓음으로써 자기 완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설파한 것과는 반대로 착한 척하는 것은 삶의 본질과 멀어지게 할 뿐이라는 통렬한 지적을 아끼지 않는다그의 잠언은 거의 독설과 날카로운 지적들이 많지만 수많은 굴곡을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신랄하면서도 인간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이 예사롭지 않다.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이라는 것 또한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잣대이며 그 잣대에 맞춰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는 가면을 써야만 한다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태어나면서 누군가를 향한 페르소나를 쓴다진정한 나를 위함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우리는 가면을 강요받기도 한다좋은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가장 좋은 가면이다하지만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씌워진 가면을 조금씩 깨어야 할 때가 온다좋은 사람이라는 프레임은 나를 속박하는 무기로 작동되어 오히려 나를 나이게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다 남의 눈치를 보며 온갖 스트레스를 받다보면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내 삶이 자본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 모순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자본주의는 이기심과 이익을 동력원으로 삶아 굴러가는 시스템이다그러면서도 이기심은 나쁜 것이라고 주입시키니시스템 자체가 이중적이며 모순적이다.-p6

 

사람은 이기적이다이기적인 본성에서 출발하지만 그래도 타인과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며 나름의 공존의 지혜를 터득하며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간다삶에서 어긋나거나 뭔가 나와 맞지 않는 타인을 한 번쯤은 대면하게 된다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생활패턴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의심이 많고 이기적이며 지난 일을 되풀이하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의 본성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나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을 비난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 뿐이다이런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주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을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가 사라졌을 때 대상을 수시로 바꿔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결국 누구나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했다 싶으면 공격성을 드러낸다자본주의 아래에 씌워진 휘황한 포장을 한 꺼풀 벗겨내면 내 영역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착한 척하느라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있는 대로 보여주는 사람이 더 낫다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으나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세 명의 현자들이 알려주는 공존의 지혜이다스스로에게나 사랑하는 이에게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너무 착하지도그렇다고 악하지도 않게그대로의 나인 채로 살아가라.’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나를 지켜내는 동시에 상대 또한 불평불만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현실주의적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p12

 

어느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하지만 모든 이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다모든 이에게 쓸모 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이며 분란에 휘말려들기 쉽다.-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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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주는 건 그만하겠습니다 - 나를 막 대하는 인간들에게 우아하게 반격하는 법
로버트 I. 서튼 지음, 문직섭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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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도 또라이, 저기도 또라이, 또라이 천지다. 또라이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또라이를 간단하게 처치할 방법이 있을까부제 나를 막대하는 인간들에게 우아하게 반격하는 법을 달고 있는 참아주는 건 그만하곘습니다는 일명 또라이 퇴치법을 담은 내용이다

 

스탠퍼드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스탠퍼드 행동과학 고등연구센터CASBS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또라이를 해결할 수 방법을 알려 달라는 약 8천통의 이메일을 받게 되면서 또라이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또라이 심층분석을 통해 공인 또라이를 진단하는 방법을 시작하여 또라이를 상대하는 도망과 회피, 버티기와 반격의 기술을 알려주고 있다.

 

또라이에 대한 무지(참아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열 가지 거짓말

현실 부정 : “상황이 그렇게 나쁜 건 아냐.”

개선되고 있다는 허상 : “정말 나아지고 있어.”

헛된 희망 : “머지않아 상황은 훨씬 더 좋아질 거야.”

오지 않을 내일에 대한 기대 : “중요한 일만 끝내고 나면곧바로 더 나은 일을 찾아 나설 거야.”

고통의 가치에 대한 맹신 : “많이 배우고 있으며 정말 원만한 관계도 유지하고 있으니혹독하고 모욕적인 환경도 견딜 만한 가치가 있어.”

구세주 콤플렉스 : “일을 이만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는 없어.”

근거 없는 자신감 : “상황은 분명 어렵지만난 강한 사람이야이 정도에 흔들리지 않아!”

자신이 다 할 수 있다는 오만함 : “물론 상황이 어렵지만나는 일과 삶을 잘 구분하니까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을 거야.”

자발적 고통 감내 : “나에게 분명히 힘든 상황이지만다른 사람에게는 더 힘든 상황일 거야그러니 내가 불평할 자격은 없어.”

억지스런 자기 위안 : “여기도 힘들지만다른 데는 더 끔찍할 거야.”


저자는 또라이에 대한 무지로 인해 또라이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모른 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또라이를 대하고 있다 충고한다. 더군다나 온라인에 넘쳐나는 또라이들, 공인된 또라이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경우에는 할 수만 있다면 관계를 끊어야한다고 충고한다. 조사에 의하면 사이비폭력을 겪은 이들의 60% 는 무시하였으며 8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은 그 방법이 효과적이라 대답했다. 그 가운데 20% 센트는 자신을 괴롭히는 또라이에게 정면으로 대항하였으며 상황이 개선되었다고 하였다. 벗어나는 건 번거롭지만 또라이에게서 도망가는 기술은 맞서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라이를 안 보고 살면 좋겠지만 또라이를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마주치는 횟수를 줄여야 한다. 눈치만으로 또라이를 피하는 7가지 회피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1. 일정거리 유지하기/2. 교묘하게 사라지기/3. 반응하지 않는 연습 /4.‘자발적투명인간 되기/5. 인간 방패 내세우기/6. 나만의 숨 쉴 공간만들기/7. 동료들과 조기 경보 시스템만들기

 


회피의 기술이 있는가 하면 참아주는 기술도 있지만,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또라이를 참아주다 보면 또라이가 나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라이에게 대하는 반격의 기술 여섯 가지를 활용하면 조금은 효과가 있을 듯하다. 또라이에게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솔직한 자세로 대응하기/ 적극적으로 반격하기/애정공세와 아부를 통해 반격하기/ 달콤하지만 헛될 수도 있는 소소한 복수하기/ 또라이를 교정하고, 제압하고, 쫓아내는 시스템 활용하기 / 이러한 것들도 소용없는 또라이라면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의 방법이다.


다른 사람을 또라이로 낙인 찍는 건 신중하게,

자신을 또라이로 인정하는 건 신속하게 하라.


살아가면서 또라이 한 번 안 만나본 사람 없겠지만 불과 몇 년 전에 어마무시한 또라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와 직접적인 마찰은 없었지만 내 동료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그 괴롭힘을 상상을 초월하여 동료는 또라이를 고발하기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또라이가 아니었겠지만 또라이는 동료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이유로 나에게까지 해코지를 하였다. 또라이들은 상상의외로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이후 나는 무시로 일관하며 투명인간으로 그 또라이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또라이의 집착과 괴롭힘을 당하는 동료의 고통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과 약점을 가지고 산다. 또라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또라이들은 자신의 단점과 약점은 철저히 무시하고 타인의 잘못만을 물고 늘어진다. 그 또라이도 그랬다. 자신의 행동은 무조건 옳았고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이었다. 자신의 나쁜 행동이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또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 시대의 힐링멘토 김창옥 교수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늘 유쾌하기만 하신 분이 공황장애를 극복하게 되었던 과정을 설명해 주는 강의였다. 그는 여기도 또라이 저기도 또라이, 또라이가 너무 많아서 어딜 가나 또라이만 넘쳐나서 사는 게 고통스러워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공황장애로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또라이가 넘쳐나는 세상만 보았던 자신의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명상과 수련을 통해 깨닫게 되자 이후 또라이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라이가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모든 이들을 또라이로 보며 적대시하게 되면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타인을 공격하는 또라이를 만나거나 또라이라 의심되는 사람을 직면하게 된다면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단순하게 처리하고 상황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다. 다소 유쾌하고 즐겁게 다양한 또라이들을 상상하며 읽게 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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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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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조차 정의란 정의되지 않은 채 공동담론의 몫으로 남겨졌다.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삶에서 정의를 찾는일은 쉽지 않다. 자본주의 씨앗은 남의 것을 빼앗아 일궈낸 제국의 착취와 폭압으로 뿌려졌다. 그 가운데 정의란, 자본주의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동하였다. 정의는 나와 타인 사이를 이어주는 중심추 같은 것이다. 나의 아픔이 타인의 아픔이며 나의 슬픔이 타인의 슬픔이라는 공감대가 있어야만 정의는 실현되어질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했던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다. 타인의 이익은 나의 것이었으며 열등한 민족의 땅을 빼앗아도 정당한 것이었던 정복의 시대에는 포식자와 피식자만 존재하였다. 피식자에게 감정을 이입한다는 것은 포식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가상의 공포대상이 필요하였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정의는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야 했다. 이때의 정의로운 사람이란 야만인을 가장 많이 잡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이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제국주의자들의 가혹한 정치의 이야기이자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정의라는 톱니바퀴와 맞물려 돌아가며 진실을 파헤쳐가는 자기고백의 소설이다.

 

제국의 변경에서 최고 책임자로 근무 중인 치안판사는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가혹한 고문과 폭행을 하는 졸대령을 무척이나 혐오한다. 어린아이는 졸대령의 채찍에 실신하였고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들은 매 맞아 죽어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치안판사는 고통과 연민,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이들은 야만인이라는 상상 속 괴물을 상대로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고 제국주의의 군인들은 유목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가혹한 폭행과 학대를 정당화하였다. 실체 없는 야만인은 상상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더욱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되어갔다. 허나 야만인의 현실판 유목민들은 헐벗고 가난한 떠돌이 집단이었다. 치안판사는 야만인이라는 유목민을 잔인하게 대하는 제국 군인들을 경멸하지만, 차마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상처받은 인질들을 치료해주는 것으로 거리를 둔다. 이때까지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걸인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추하고 더럽고 앞을 보지 못했으며 다리를 절고 있는 불구의 여인.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고문을 받는 게 치욕적이라며 자살을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본 후 고문을 받다 실명되고 다리 한 쪽이 기이하게 꺾여 있는 그녀는 감정이 없는 텅빈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추운 겨울을 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치안판사는 그녀에게 겨울을 나기까지 일자리를 주겠다며 데려온다. 밤마다 그는 그녀의 다친 발과 몸을 씻겨주는데, 성스러운 의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추하고 일그러진 얼굴의 그녀를 보며 모진 고문과 폭행으로 망가지기 이전의 삶을 상상하며 제국 군인들의 무자비함을 떠올리곤 한다. 그녀를 씻기는 과정은 후에 그가 고백하듯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손을 씻는 정화의 의식이다. 그는 그녀를 씻기며 그녀를 주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자신이 모르는 평범한 모습의 그녀, 야만인 포로로 잡혀 오기 전의 행복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제국주의자들이 가한 폭행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되새기곤 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는 상상의 작업들은 욕망에 충실하며 아무 죄책감 없이 여자와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곤 하였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고 제국의 군인들과 다름없이 자신역시도 권력자로 그들 위에 군림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그는 눈 먼 여자에게 한 것처럼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다친 곳을 치료해주며 일자리를 준다. 그의 이러한 행위들은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는 위태로운 생각에 빠진 하찮은 민간인 관리으로 보이게 하였고, 위험인물이라는 낙인을 찍게 하였다.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오?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소. 이건 사형집행인들이나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 보고싶었던거요. 잠깐! 조금만 더 들어줘요. (중략)여하튼, 일이 끝나고 나서 음식을 먹는 게 쉬운 일이오? 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은 손부터 씻고 싶어 할 것 같거든. 하지만 손을 씻는 것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소. 성직자가 끼어들어야 할 정도의 일이거든. 일종의 정화시키는 의식 말이오. 여하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소? 가령 식탁에 앉아 가족이나 동료들과 함께 빵을 잘라 먹는 일 같은 일상적인 삶 말이오.”(p207)

 

눈 먼 여자를 사랑하면 할수록 치안판사는 그녀를 불구를 가진 한 야만인여성으로 대하기보다 같은 눈높이에서의 사랑, 즉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녀를 부족에게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산 넘고 물을 건너 모래 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건너는 힘든 여정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야만인들과 내통했다는 죄로 감옥에 가게 된다. 하루아침에 최고의 권력자에서 죄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물과 뒤섞인 방 안에 남겨진 바퀴벌레가 전부였다. 평화롭고 온화했던 변방의 도시는 치안판사가 구속된 이후로 전쟁에 휘말리고 야만인들에게 폭정을 가하는 나날이 지옥처럼 재연되곤 하였다.

 

나는 여자 속옷을 입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던 날, 마지막 남은 권위의 흔적마저 잃어버리고 늙다리 광대가 되어버린 상태다. 게다가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이나 바닥에 놓은 음식을 개처럼 지저분하게 핥아먹어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감금당하지도 않는다.’

 

나는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불쌍한 죄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법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건 차선의 세계다.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다.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말이다.” -p229

 

 

법은 정의의 실현이라고 믿어왔던 판사에게 비치는 모순덩어리와 비합리적인 현실에서 법이 아무쓸모가 없을 정도로 인간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자라는 포식자에 의해 가혹하게 착취를 받는 피식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자본주의 세계는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차 있다. 자본주의가 그런 착취와 모순 위에 세워진 것임을 이해한다면 현재라는 혼돈의 시대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정의란 무엇일까. 우리는 아직도 그 해답을 모르고 있다. 야만인이라는 가상의 적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생산하며 착취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비단 가상의 적은 제국주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은 또다른 형태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며 공감을 하지 못하는 이들 역시도 또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자다. 이 시대의 혼돈과 불안의 원류를 거슬러가다보면 현대의 모순과 부조리된 세상이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치안판사가 그러한 것처럼. 정의란 시대마다 다르게 규정되어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나, 정의를 타고난 인간의 천성은 정의롭지 못한 정의를 보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정상이다. 치안판사의 고통과 괴로움의 원천은 바로 제국주의의 시스템이 가혹한 착취와 억압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규정된 시대의 정의 야만인을 가장 많이 죽이는것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야만인들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였던 것은 평생 법을 지키며 살아온 자신의 양심이 곧 정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정의는 무엇일까.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정의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의의 얼굴을 하고 있는 수많은 위선속에서 진짜를 찾는 일은 자본주의가 남긴 숙제나 다름없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믿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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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 내 안의 빛이 되어준 말들의 추억 월간 정여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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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정여울의 여섯 번째 책은 내 인생에 가장 빛나던 순간의 이야기인 반짝반짝이다. 정여울의 글은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워 읽다보면 마음 한 구석이 온기로 가득 차오른다. 의성어로 표현되는 삶의 진경들과 평소 잘 접하지 못하는 화가의 소개가 함께 있는데 반짝반짝하는 순간을 표현해주는 화가는 프란츠 마르크이다. 절제된 색채와 형태만을 용인하는 당시 독일의 지배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무지갯빛, 총천연색으로 번져가는 색채의 향연(p15)이 제목과 잘 어울린다. ‘무지개의 색을 훔친 화가로 불리는 프란츠 마르크의 그림은 생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관계의 틀어짐으로 인해 낮은 자존감과 자주 찾아오는 감정의 기복들로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나를 반짝이는 존재로 만들어준 말 한마디를 최근에 들었다. ‘당신은 나의 멘토십니다.’ 이 말은 모든 슬픔과 고민을 날려주는 미풍으로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타인을 반짝이게 해주는 그 사람의 언어를 통해 내게 없는 온유함의 힘을 느꼈다. 낮은 자조감과 열등감은 분노에 쉽게 노출되게 하였고 온유함의 언어보다는 날 선 언어를 쏟아내기 일쑤였던 내게 그의 온유함은 분노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따스한 햇볕이었다는 걸 다시금 떠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내 생을 반짝거리게 했던 배경은 온유함이라는 병풍이었다. 당연하지만 적당하게 분노할 수 있는 온유함이라는 지혜가 삶을 반짝거리게 한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조금씩 이해하였다.

 

온유함은 분노와 관련된 중용이다. 당연히 화낼 일로, 당연히 화내야 할 사람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만큼, 적당할 때에, 적당한 기간 동안 분노하는 사람은 칭찬받는다. 그런 사람은 온유한 사람일 것이다. 칭찬받는 것은 그의 온유함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은 대게 침착하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의 지시에 따라 당연히 화내야 할 일에 적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기간에만 분노하니 말이다. -아리스토켈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우리 생을 반짝이지 못하게 하는 건 적당하게 분노하지 못해서이다. 분노를 쉽게 표출하고 분노의 언어를 쏟아내는 이유는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미디어에 익숙해져있고 현대인 누구나 권태로움이라는 무력감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태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배움이 가장 좋다. 무언가를 시도하고 성취하는 경험은 일상의 권태로움을 벗어나 생을 더욱 반짝이게 하는 좋은 자극제이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 기대치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이 만들어놓은 장벽이나 다름없다. 그 기대치란 장벽은 나의 욕망과 감정에 의한 판단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미움이나 질투역시도 내 판단의 잣대에 불과한 것이다. 이 장벽을 걷어내면 타인을 향한 권태의 원인과 실망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보이게 된다. 타인에 대한 기대가 많을수록 권태와 절망도 깊어지는 법이다. 타인을 향한 기준과 잣대를 나에게 향하게 하면 지금 현재 분노와 미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생을 반짝이게 해주는 것은 조금씩 미움을 벗고 적재적소에 적당히 표현되는 온유함이다.

  

권태의 치명적인 원인 중 하나는 내 삶을 내가 제대로 꾸려가지 못한다.’는 무력감이다. 삶의 기쁨이 내 안에서 용솟음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반드시 외부에서 찾아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우리를 권태롭게 한다.-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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