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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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조차 정의란 정의되지 않은 채 공동담론의 몫으로 남겨졌다.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삶에서 정의를 찾는일은 쉽지 않다. 자본주의 씨앗은 남의 것을 빼앗아 일궈낸 제국의 착취와 폭압으로 뿌려졌다. 그 가운데 정의란, 자본주의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동하였다. 정의는 나와 타인 사이를 이어주는 중심추 같은 것이다. 나의 아픔이 타인의 아픔이며 나의 슬픔이 타인의 슬픔이라는 공감대가 있어야만 정의는 실현되어질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했던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다. 타인의 이익은 나의 것이었으며 열등한 민족의 땅을 빼앗아도 정당한 것이었던 정복의 시대에는 포식자와 피식자만 존재하였다. 피식자에게 감정을 이입한다는 것은 포식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가상의 공포대상이 필요하였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정의는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야 했다. 이때의 정의로운 사람이란 야만인을 가장 많이 잡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이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제국주의자들의 가혹한 정치의 이야기이자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정의라는 톱니바퀴와 맞물려 돌아가며 진실을 파헤쳐가는 자기고백의 소설이다.

 

제국의 변경에서 최고 책임자로 근무 중인 치안판사는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가혹한 고문과 폭행을 하는 졸대령을 무척이나 혐오한다. 어린아이는 졸대령의 채찍에 실신하였고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들은 매 맞아 죽어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치안판사는 고통과 연민,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이들은 야만인이라는 상상 속 괴물을 상대로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고 제국주의의 군인들은 유목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가혹한 폭행과 학대를 정당화하였다. 실체 없는 야만인은 상상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더욱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되어갔다. 허나 야만인의 현실판 유목민들은 헐벗고 가난한 떠돌이 집단이었다. 치안판사는 야만인이라는 유목민을 잔인하게 대하는 제국 군인들을 경멸하지만, 차마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상처받은 인질들을 치료해주는 것으로 거리를 둔다. 이때까지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걸인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추하고 더럽고 앞을 보지 못했으며 다리를 절고 있는 불구의 여인.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고문을 받는 게 치욕적이라며 자살을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본 후 고문을 받다 실명되고 다리 한 쪽이 기이하게 꺾여 있는 그녀는 감정이 없는 텅빈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추운 겨울을 나기는 힘들어 보였다. 치안판사는 그녀에게 겨울을 나기까지 일자리를 주겠다며 데려온다. 밤마다 그는 그녀의 다친 발과 몸을 씻겨주는데, 성스러운 의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추하고 일그러진 얼굴의 그녀를 보며 모진 고문과 폭행으로 망가지기 이전의 삶을 상상하며 제국 군인들의 무자비함을 떠올리곤 한다. 그녀를 씻기는 과정은 후에 그가 고백하듯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손을 씻는 정화의 의식이다. 그는 그녀를 씻기며 그녀를 주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자신이 모르는 평범한 모습의 그녀, 야만인 포로로 잡혀 오기 전의 행복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제국주의자들이 가한 폭행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되새기곤 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는 상상의 작업들은 욕망에 충실하며 아무 죄책감 없이 여자와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곤 하였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고 제국의 군인들과 다름없이 자신역시도 권력자로 그들 위에 군림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그는 눈 먼 여자에게 한 것처럼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다친 곳을 치료해주며 일자리를 준다. 그의 이러한 행위들은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는 위태로운 생각에 빠진 하찮은 민간인 관리으로 보이게 하였고, 위험인물이라는 낙인을 찍게 하였다.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오?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소. 이건 사형집행인들이나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 보고싶었던거요. 잠깐! 조금만 더 들어줘요. (중략)여하튼, 일이 끝나고 나서 음식을 먹는 게 쉬운 일이오? 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은 손부터 씻고 싶어 할 것 같거든. 하지만 손을 씻는 것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소. 성직자가 끼어들어야 할 정도의 일이거든. 일종의 정화시키는 의식 말이오. 여하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소? 가령 식탁에 앉아 가족이나 동료들과 함께 빵을 잘라 먹는 일 같은 일상적인 삶 말이오.”(p207)

 

눈 먼 여자를 사랑하면 할수록 치안판사는 그녀를 불구를 가진 한 야만인여성으로 대하기보다 같은 눈높이에서의 사랑, 즉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녀를 부족에게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산 넘고 물을 건너 모래 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건너는 힘든 여정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야만인들과 내통했다는 죄로 감옥에 가게 된다. 하루아침에 최고의 권력자에서 죄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물과 뒤섞인 방 안에 남겨진 바퀴벌레가 전부였다. 평화롭고 온화했던 변방의 도시는 치안판사가 구속된 이후로 전쟁에 휘말리고 야만인들에게 폭정을 가하는 나날이 지옥처럼 재연되곤 하였다.

 

나는 여자 속옷을 입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던 날, 마지막 남은 권위의 흔적마저 잃어버리고 늙다리 광대가 되어버린 상태다. 게다가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이나 바닥에 놓은 음식을 개처럼 지저분하게 핥아먹어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감금당하지도 않는다.’

 

나는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불쌍한 죄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법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건 차선의 세계다.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다.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말이다.” -p229

 

 

법은 정의의 실현이라고 믿어왔던 판사에게 비치는 모순덩어리와 비합리적인 현실에서 법이 아무쓸모가 없을 정도로 인간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자라는 포식자에 의해 가혹하게 착취를 받는 피식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자본주의 세계는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차 있다. 자본주의가 그런 착취와 모순 위에 세워진 것임을 이해한다면 현재라는 혼돈의 시대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정의란 무엇일까. 우리는 아직도 그 해답을 모르고 있다. 야만인이라는 가상의 적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생산하며 착취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비단 가상의 적은 제국주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은 또다른 형태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며 공감을 하지 못하는 이들 역시도 또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자다. 이 시대의 혼돈과 불안의 원류를 거슬러가다보면 현대의 모순과 부조리된 세상이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치안판사가 그러한 것처럼. 정의란 시대마다 다르게 규정되어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나, 정의를 타고난 인간의 천성은 정의롭지 못한 정의를 보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정상이다. 치안판사의 고통과 괴로움의 원천은 바로 제국주의의 시스템이 가혹한 착취와 억압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규정된 시대의 정의 야만인을 가장 많이 죽이는것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야만인들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였던 것은 평생 법을 지키며 살아온 자신의 양심이 곧 정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정의는 무엇일까.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정의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의의 얼굴을 하고 있는 수많은 위선속에서 진짜를 찾는 일은 자본주의가 남긴 숙제나 다름없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믿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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