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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2월
평점 :
메멘토모리, 언젠가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삶이 소중한 이유는 죽음이라는 유한성 때문이다. 죽음이 그닥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더니 어느 순간부터 동료나 지인들의 부고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죽음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도 그러했을까. 인간으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삶(부와 명예와 같은 모든 것),에 이르렀을 때 죽음에 관한 성찰을 하면서 그의 삶은 바뀌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며 톨스토이가 천작하였던 죽음의 성찰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문학은 삶과 죽음에 대한 도덕적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죽음에 관한 천착 이전에 톨스토이는 삶을 즐겼고 사랑했고 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거리낌 없이 하였다. 귀족이었으며 작가로서의 명성은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위대한 작가였던 톨스토이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금욕적인 생활과 빈민굴에 들어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p26
상테르부르크의 중간급 치안 판사였던 이반 일리치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탐욕적이지도, 욕망에 충실하지도, 그렇다고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나쁜 짓을 일삼은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매일매일 돈걱정을 하며 사는 그저 보통의 사람이다. 자잘한 봉급과 승진에 대한 걱정과 아내와의 잦은 다툼에 지쳐 일에만 몰두하는 아주 전형적인 중년 남성이다. 때로는 판사라는 직위가 주는 우월감에 도취되어 고위층 인사들과의 위선적인 만남을 즐겼고 상류층으로서의 평온한 삶에 안도하는 그런 평범한 남자. 하지만 그에게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차라리 불행의 전조라도 있었다면 그는 덜 불행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급작스레 찾아온 불치병은 유쾌하며 지적이기까지 했던 그를 우울하고 어두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결혼……. 뜻하지 않게 했던 것. 환명, 아내의 입 냄새, 애욕, 위선! 이 생명력 없는 업무, 그리고 돈 걱정, 그렇게 보낸 1년,2년, 그리고 10년, 20년. 언제나 똑같은 삶. 살면 살수록 생명은 사라져 가는 삶. 그래, 나는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그랬었던 거야. 분명 사람들 눈에 나는 올라가고 있었어. 하지만 정확하게 그만큼씩 삶은 내 발아래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다 끝났어. 죽는 것만 남았어! -p110
이반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주위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동정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고통을 털끝만큼도 이해해주지 않음에 그는 더욱 좌절한다. 이반의 병을 위해 돈으로 저명한 의사들을 불러 모았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고통에 무너지는 육신과 상황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희망이 수시로 교차하며 그의 머릿속을 고통이 갉아먹을 동안 죽음의 공포는 더욱 격렬해져 간다. 이반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성찰되는 죽음의 성찰은 톨스토이의 뼈아픈 자각이었을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듯이 이반은 임종 전에서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진다.
『어느 광인의 수기』는 정신병을 가지고 있지만 서른 다섯까지 보통사람으로 살아온 ‘나’의 이야기다. 어쩌면 광인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한 미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로 읽혀지기도 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이반이 평범해서 끔찍한 삶을 살며 끝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잠든 것과는 달리 광인의 수기에서 ‘나’는 다른 결말을 암시한다. 이반과 ‘나’는 톨스토이의 자화상이나 다름없으며 이 두 캐릭터를 통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듯했다. 광인의 수기 ‘나’역시도 이반처럼 판사이며 육체적 노동을 등하시하였으며 기름진 음식을 좋아했고 여자가 주는 쾌락을 즐겼으며 , 돈을 사랑했다. 또한 매우 건강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죽음의 공포, 그것이 ‘나’를 깨웠다.
죽음이 끔찍한 것인 줄 알았는데,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니 끔찍한 것은 죽어가는 삶이었다.-p139
나는 현재 살아있고, 과거에도 살았으며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죽음이 찾아와서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죽기 위해서?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죽어야 하나? 두렵다. 죽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건 더 두려운 일이다. 그럼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가? 어째서지? 죽기 위해서?-p145
죽음의 공포와 대면한 ‘나’는 이후, 많은 것들을 포기해 간다.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농지구매를 취소하고 교회 입구에 있는 걸인들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내어준다. 마치 톨스토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이후 톨스토이 역시 광인의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간다.
고통가운데 몸부림치며 죽었던 이반과 광인의 ‘나’는 대조되는 면이 있다. 톨스토이는 『어느 광인의 수기』의 ‘나’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죽어가는 삶’을 가장 경계하였으며 가장 끔찍이 생각했다. 아마도 죽음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빗대어 무의미한 생을 살아온 이반에게 죽음이라는 삶의 파도가 어떤 방식으로 생을 휩쓸어 가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인 동시에 광인인 ‘나’이다. 죽음을 기억하지 못했던 이반과 죽음을 기억하였던 ‘나’, 이반은 고통가운데 죽어갔지만 ‘나’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고통을 나누어 사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삶의 유한함을 깨닫는 것은 현재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 죽음이 있는 것을 기억하는 자는 삶을 덧없게 보내려 하지 않으며 의미 있는 것들로 삶을 채우려하기 때문이다.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이 더욱 가치 있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찍이 죽음을 성찰하며 삶에서 의미 있는 일에 눈을 떴던 광인의 ‘나’와 불치병에 걸려서야자신의 삶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아가는 이반. 누구나 ‘나’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이반’이 될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삶을 살든 선택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는 이는 ‘나’처럼 보다 의미있는 일에 마음을 쓸 것이고 죽음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는 이반처럼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자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노쇠해가는 육체와 질병에 대한 공포와 나이듦이라는 비극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단순하지 않더라도, 비록 평범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기억하며 현재의 삶을 보다 가치 있는 것들로 채워가는 삶이 덜 끔찍하다는 것을. 메멘토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