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농담 - 기형과 괴물의 역사적 고찰
마크 S. 브룸버그 지음, 김아림 옮김 / 알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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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젼을 통해 '앨리슨 래퍼'의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구족화가로 유명한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듣던 '불구'를 이겨낸 의지의 표상이다. 나면서부터 중증 장애인으로 판정됐고, 모든 사람에게 ‘괴물’로 인식된 그녀는 취재중에 장애의 그늘은 커녕 잘 웃고 낙천적인 모습을 보이며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뿐이 아니라 없는 다리로 운전하는 모습을 자못 경이롭게 보았던 기억이다.그러나 그녀의 고백을 통해 가장 큰  고통은 신체적인 불편함과 시설의 폭력이 아닌 바로 스스로의 ‘차이’의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자라면서 또래들과 다르다는 차이를 알게 되었을 때 ,아무리 노력하고 똑같이 옷을 입어도 장애가 없는 또래 아이들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도 잠시 그녀는 그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고 나서야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태어나면서 장애와 싸워야 했던 그녀는 어머니와 남편에게 버림받고 임신을 하지만, 의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이를 낳았다. 스펀지를 단 막대를 입에 물고 아이를 씻기고, 어깨로 유모차를 밀고, 발로 기저귀를 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똑같은 엄마이다. 오래 전 이 다큐를 보면서 장애는 그저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없다” 며 자신의 팔 다리 없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냐며 카메라를 통해 밝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비장애인의 몸과 마찬가지로 장애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출처: 장애인 신문에서 발췌>

 

 

전형과 기형 그리고 이형 사이에서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우리가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하고 흠없이 완벽하다고 하는 전형을 통해 진정으로 포착할 수 있는 세계보다 더 무궁무진한 자연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훨씬 더 무궁무진한 자연을 통해 언제나 예외가 있으며 전형적인 것을 위태롭게 하며 자연의 불완전한 것을 통해 완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비정상적이거나 기형인 생명체들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가 '전형'으로 알고 있는 생물체가 아닌 '이형'과 '기형'이라는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어 탐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책에서 '이형’은 발생과 진화의 비밀을 풀어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형들은 개체와 집단 그리고 신체와 행동 속에 감춰진 발생의 가능성과 그 과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형은 라틴어로 ‘자연의 농담Iusus natura’이라 불렸는데, 이 말은 이형을 괴물로 인식하는 현대의 관점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 말은 전형과 마찬가지로 '이형'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뜻을 담지하고 있다. 이형은 그 생김새가 복잡하고 놀라워서 색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과학적 영감과 진보를 가로막는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바로잡는 존재들이다. 어쩌다 보니 더 두드러지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했을 뿐이다.(P11)



우리가 알고 있는 샴 쌍둥이나, 다리가 하나 더 달린 ‘기형’들은 몸만이 아니라 행동에서도 자연에서 작동하는 근원적인 과정을 드러낸다. 언뜻 보기에는 복잡하고 놀라워서 색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이들은 사실 완벽하게 자연적인 존재다. 기형들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더 넓은 관점에서 사물의 얼개를 풀어가다 보면 우리 모두는 유별나며 기묘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형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며 어쩌다 보니 더 두드러지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뭇 특별한 존재일 뿐이다.

 


 

괴물들은 자연의 농담이 아니다. 그들의 조직에는 엄격하게 결정된 법칙과 규칙이 적용된다. 그리고 이는 동물계를 규정짓는 규칙, 법칙과 동일하다. 한마디로 괴물 역시 정상적인 존재다. 오히려 세상에 괴물이란 없다. 자연은 하나의 큰 전체를 이룬다. -p34    

 

 

 

사지가 달린 파충류로부터 수백만 년에 걸쳐 등뼈의 통상적인 구성이 변형되면서 몸이 늘어나고 목뼈가 갈비뼈와 연계된 다수의 흉추로 변형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앞다리가 사라지고 이어 뒷다리가 사라져 오늘날의 뱀이 되었다. 저자는 비단뱀의 몸을 자세히 보면 뒷다리의 흔적이 있으며, 비단뱀보다 더 진화한 코브라나 북살모사 같은 종에서는 이런 뒷다리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 진화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발생 자체에 놓인 핵심 원리들을 몸의 형태와 기능의 용어를 통해서, 또 그것들을 만든 발생적 메커니즘의 용어를 통해서 밝혀낸다. 이어서 ‘기형’과 ‘괴물’들의 역사적 중요성과 발생적, 진화적 관점 사이에서 이들이 갖는 역사적으로 견고한 관계를 이야기한다. 마지막장 <성에는 언제나 모호함이 존재한다>에서는 성적 기이함을 진화적인 우아함으로 끌어올린 자연의 사례( 은연어, 아마존몰리, 점박이하이에나 등등)을 통해 우리가 '이형'이라 생각했던 것들과 '기형'적인 모든 종들을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를 명징하게 깨우쳐 준다.

 

 

 

이렇게 이 책은 진화와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다양한 종류의 이형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과는 차별되는 접근을 하였다. 기존에 환경이든 유전적인 이유이든 '이형'과 '기형'을 차별된 시각으로 보았다면, 아마도 이 책은 그런 차별을 '차이'로 바꾸어 놓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자는 과거 자연의 실수로 인식하거나 정상적인 것과는 다르게 보는 시선을 거두고 자연의 일부로서 공존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주며 결국 '이형'과 '기형'은 우리가 끌어안고 가야할 자연의 위대한 산물임을 이 책을 통해 증명해준다. 구족 화가 '앨리슨 래퍼' 를 통해 삶의 위대함을 깨닫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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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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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독거노인이 사망한 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발견이 되었다. 군청으로 연락이 와 장례를 치러주게 되었는데 그 노인의 장판에서는 썩은 돈 3백만원이 나왔다. 장판에 돈을 숨겨 놓고 배고파 죽은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프다기 보다는 노인이 돈을 악착같이 모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가슴이 아린다. 그래서인지 독거노인의 죽음과 맞물려 이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라는 깊은 심연속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 '자본주의'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나 거대담론으로 파고들어간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와 거대담론으로서의 자본주의는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한다.그만큼 자본주의는 친숙하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으로서 자본주의를 철학자 강신주는 욕망의 집어등으로 표현하였다. 수많은 욕망, 우리는 하루 중에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그것이 물건이든 , 사람이든, 어떤 것이든 '욕망'에 지배받고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은 '나'를 위한 욕망일까? 아니면 '타자'를 향한 욕망일까?

 

 

상처 받을 권리』에서 저자 강신주는 자본주의 체계를 해부하여 곳곳에 메스를 들이댄다. 자본주의 속에서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하는 거짓된 인문학보다는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인문 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친숙하고 평범한 삶을 낯설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여 있고, 그로부터 상처받는지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다행이도 문학과 철학자들로 인해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저자는 '행운'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삶’을 낯설게 보지 않고서는, 이 의식하기조차 두려운 상처를 치유하기란 난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상처 받을 권리』의 구성은  문학자 네 사람과 철학자 네 사람을 짝패로 하여 자본주의의 삶을 원초적으로 다가가게 한다. 이들의 삶과 문학과 철학에서 비롯된  '욕망'이라는 사유는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내면속에서 '진짜'를 찾게 해 주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이상 vs 짐멜),(보들레르 vs 벤야민),(투르니에 vs 부르디외),(유하 vs 보드리야르)

이상은 최초로 '돈'의 논리를 찾은 문학자로서 짐멜은 화페경제의 모순점을 지적한 철학자로서 짝을 이루어 '돈'의 지배를 받게 된 무의식의 트라우마를 말한다. 화폐경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이루어졌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와해시키고 , 오직 돈으로만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우리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에 산다는 것은 자본이 가져다주는 축복과 풍요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거기에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중의 하나인 사랑마저도 왜곡할 힘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독거노인의 죽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노인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오면서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돈을 가진 자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악착같이 돈을 모았을 것이다.  유년 시절에 겪었던 ' 경제적 트라우마'로 인해 자리잡은 '돈'이 절대적인 '힘'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인된 경제적 트라우마, 경제적 공포로 인하여 돈에 집착하였으나, 그런 돈의 공포로 인하여 결국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돈에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심리적인 메커니즘은 쇼핑, 주식, 펀드, 재테크 ,도박 등 '돈'을 향한 욕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는 19세기 파리를 매춘부와 같다고 묘사하였다.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성적으로 몸을 팔지 않았을 뿐 ,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말한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고통스러운 곳이기에 '종교'가  그들에게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벤야민은 돈이라는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 , 그리고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소망과 기대 심리가 인간에게 존재하였기에 자본주의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것으로 본다. '매춘'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통해 정당화되는 강간이라고 한다. 동시에 사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다고 한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산업자본주의의 화폐경제는  인간의 시간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미래를 '가능성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미래를 가능성의 장'으로 가장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계기로 바꾸었으며 이것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게 하는 진보성을 띠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종 목적이고 인간은 언제든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회. 만약 우리가 인간을 최고의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된다고 보았다.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모습을 벗어야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삶이란 연극에 불과하다는 통찰에 이른 철학자 에펙테토스는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인 연극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우리의 모든 욕망은 자아가 아닌 타자를 향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마주해야 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각인된 기존의 욕망들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힘에 의해 철저히 상처받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태어나면서 씌어지는 페르소나를 벗고 맨 얼굴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고 있는 삶의 모습을 저자는 면밀하게 살피고 그 상처를 마주보게 하여 상처를 '진정한 상처'로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하에 태어나 돈을 모으기만 한 채 죽어간 쓸쓸한 독거노인의 죽음이 그저 모르는 타인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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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一針 -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 끝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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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기묘한 인연으로 만난 벗이라 할지라도 그와 더불어 나누는 대화가 무료하고 함께하는 행동이 구차하다면 차라리 홀로 책 속에서 벗을 찾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가끔 내 오랜 친구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모두 사는 것이 바쁜 데다가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그리운 친구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가끔은  시간을 내어서라도 그리운 이들을 만나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 시간을 내기도 쉽지가 않다. 그때마다 떠올리며 위로받는 말이 박지원의 '책속의 벗'이라는 말이다. 막힌 혈을 풀때 침을 한대 맞으면 막힌 혈도가 풀리듯이 이 책은 그런 막혔던 정신에 일침을 가해준다. 고전에 나온 구절들은 모두 사자성어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100개의 글을 25개씩 4부로 나누었다. 짧은 고전 글귀에 맑은 기운이 불쑥 찾아오고 가슴이 뭉클해지며 정신이 바짝 드는 글귀들이다.

 

 

 

1부 <마음의 표정> 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이명비한(耳鳴鼻鼾) 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귀울음과 코골기,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안 알아준다고 난리고, 코 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먼저 안 것에 화를 낸다. 이명은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코 골기는 나 빼고 '남'이 다 아는 것이다. 저자는 별 것 아닌 것에 제 것만을 대단한 줄 아는 것을 '이명' 증에 걸린 꼬마로, 남 잘한 것은 못 보고 제 잘못은 질끈 눈 감는 '언제 코골았냐고 성내는 '시골 사람'이라고 한다. 

 

 

얻고 잃음은 내게 달려 있고

기리고 헐뜯음은 남에게 달려 있다.

 

 

저자는 좋은 글을 쓰고, 본이 되는 삶을 살려면 제 이명에 현혹되지 않고, 내 코고는 습관을 인정하면 된다고 한다. 남을 헐고 비방하는 것은 일종의 못된 버릇이며 비판과 비난을 구분 못하는 것은 딱한 습성이다. 이외에도  ‘남산현표南山玄豹  남산의 검은 표범이란 의미로 ‘배고픔을 견뎌야 박히는 아름다운 무늬’를 뜻한다.  ' 설니홍조(雪泥鴻爪)' 눈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의 이야기도 정신의 일침으로 다가온다.

 

 

2부 <공부의 칼끝> 의 이야기 중에서는 아무래도 부모이다보니 , 다산의 교육법인 문심혜두(文心慧竇) 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문심이란 풀어쓰면 '문자 알아차리는 마음'이자 '글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혜두의 '두(竇)'는 구멍이라는 뜻이니까, 혜두는 '슬기의 구멍', 곧 '지혜를 뜻한다. 즉 문심을 알고 혜두가 열려야 공부 머리가 깬다는 것이다. 그러러면 다산은 촉류방통의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계통을 갖춰 정보를 집적해 나가면 세계를 인지하고 사물을 이해하는 안목이 점차 단계적으로 열린다. 주입식 교육으로 암기위주의 학습은 슬기구멍을 막히게 하지만 하나를  배워 열로 증폭되는 공부방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 아이의 슬기구멍을 열게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3부 <진창의 탄식>에서 모든 재앙은 입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화생어구 禍生於口로 주로 입이 화근이 되는 이야기들이 많다. 칭찬은 만 사람의 입이 모여 이뤄지지만, 비방과 헐뜯음은 한 사람의 입만으로도 순식간에 먼저 나간다(방유일순) . 4부 <통치의 묘방> 편의 용종가소(龍鐘可笑)( 용모는 꾀죄죄해도 속마음은 맑았다.) 등은 사람을 볼 때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독서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서 얕게 나와야  어려운 것을 쉽게 풀이하는 심입전출이란 말이 있다. 공부는 깊어야 설명이 간결해지고 자기가 잘 알아야 남도 쉽게 이해한다는 뜻이다. 한 번 들어 알기 어려운 말은 옳은 말이 아니며 제 속이 빈 것을 남들이 알아차릴까 봐 말이 많아진다. 가끔씩 말이 많아지고 미사여구와 수식어가 남발하는 이유가 아마도 내 스스로의 공부가 깊지 못한 것인가 싶어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정민 교수가 말하는 독서법은 우작경탄(牛嚼鯨呑) 으로 우작(牛嚼)’은 ‘소가 되새김질하듯 읽는 독서법’이다. ‘한 번 읽어 전체 얼개를 파악한 후, 다시 하나하나 차근차근 음미하며 읽는 정독’이다. ‘경탄(鯨呑)’은 고래가 작은 물고기를 삼킨다는 뜻으로 고래는 바다 속에서 큰 입을 쩍 벌려서 물고기와 새우 등 온갖 것들을 바닷물과 함께 삼킨다. 소화시킬 겨를이 없다. 이것을 '고래 삼키기 독서법'이라고 하는데 고래가 닥치는 대로 먹이를 먹어치우듯 폭넓은 지식을 갈구한다. 그러나  자칫 수박 겉핥기가 되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소의 되새김질과 고래의 한입에 삼키기 독서가 서로 보완이 되어주면 아주 좋은 독서법이라고 한다.

 

 

 삶이라는 길은 전인미답의 길이다.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삶은 어렵고도 힘들다. 그런 의지가지 없는 삶에 '책 속의 벗'으로서 고전과 함께 한다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침>은 왠지 그런 책이다. 두고두고 꺼내 읽고 되새겨보고, 벗으로 삼아 함께 걸어가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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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어 2 줄리애나 배곳 디스토피아 3부작
줄리애나 배곳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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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빛을 따라가렴. 네 영혼을 따라가렴.네 영혼에 날개가 있기를.

너는 내 길라잡이야."

 

 

줄리애나 배곳이 그리고 있는 디스토피아의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대폭발에서 살아남았고 그들은 '돔'에 살고 있다. 그리고 돔 이외의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와 융합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얼굴에 흉터가 있거나, 화상이 있거나, 무언가와 융합된 모습이다. 그리고 그렇게도 살아남지 못한 사람은 짐승이나 땅과 융합되어 살아간다. 인간의 생명이란 그렇게 질기고도 모진 것이다. 그런 '바깥 '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고 몸부림친다. 대폭발시에 거울 파편이 몸에 박혀도, 플라스틱 파편이 몸의 일부가 되어도, 아기와 융합되어  평생을 짐처럼 떠안고 살지라도, 새가 등에 박혀 살지라도, 동생의 몸과 융합되어 평생을 업고 살지라도,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가는 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처절하게 살고 있었다.

 

 

돔에 살고 있는 '퓨어' 패트리지가 '바깥' 세상에 왔다는 소문은 나오는 문이 있다면, 들어가는 문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혁명군에 잡혀간 페프레시아는 자신을 뜬금없이 장교로 승진 시키고 , 퓨어를 도와 어머니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프레시아의 눈동자에는 도청 장치를 머리에는 폭파장치가 심어지게 된다.  프레시아를 처음 본 순간, 프레시아에게서 느껴진 선한 기운으로 도와주고 싶었던 등에 동생 헬머드와 융합된 '헬 캐피턴'의 도움으로 다행히 패트리지 일행을 찾게 되는데...

 

 

브래드웰은 패트리지가 바깥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들으며 ,처음부터 패트리지가 돔을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돔'의 계획이란 사실을 간파해낸다. 모든 과정을 '돔'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 와중에 아이와 융합된 마을의 여자들에게 습격을 받고 '선한 어머니'라 불리우는 사람과 모종의 거래를 하게 된다. 조건은 패트리지의 '손가락 한개 절단하기'

 

 

브래드 웰과 패트리지, 프레시아, 엘 캐피턴은 우여곡절 끝에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 동요와 단서가 어머니가 남긴 단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어렸을 적의 기억에 의존하여 어머니와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돔'의 탄생 배경과 아버지의 진실, 음모를 알게 되는데, 죽었던 '세지 형' 이 무장한 군인으로 나타나고 이들의 짧은 재회는 형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난다.

 

 

 "하늘이 멍들었구나. 폭풍우만이 그걸 낫게 하겠지."

 

 

지구는 오염되고 식수는 마실 수 없게 되고  방사능 오염에 대한 우려와 대폭팔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여 '돔'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돔'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고 '돔' 역시도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권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2권에서는 속속들이 인류가 떠안고 있던 문제들을 부각시키면서 수면 위로 존재를 드러낸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배경과  고도화된 테크날리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모든 것이 기계화된 세상. 기계화된 문명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 그러나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그런 디스토피아 세상속에서도  살기 위해 투쟁하고 살기 위해 사랑한다. 어머니와의 짦은 재회에서 어머니는 패트리지에게 "싫다고 말할 권리, 옳은 것을 위해 반대할 수 있는 권리" 를 남겨주고 싶었다고 한다.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유'라는 권리는 아마도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단 하나의 끈이 아닐까 한다. 이들의 삶은 그래서 계속된다. 비록 하늘에서 검은 재가 내리고 돌아갈 집이 없을지라도...삶은 계속 된다. 우리의 삶이 고통속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되듯이 패트리지와 프레시아의 길고 긴 여정 끝에는 부디  밝은 태양이 빛추기를 소망해본다.  이 책은 디스토피아 3부작의 1권으로, 앞으로 2권 『퓨즈(Fuse)』, 3권 『번(Burn)』이 각각 2013년, 2014년 발표될 예정이다. 숨가쁜 전개와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 『퓨어』였다. 다음 시리즈를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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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어 1 줄리애나 배곳 디스토피아 3부작
줄리애나 배곳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디스토피아 영화중에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는 바코드가 없으면 구매할 수 없다는 내용을 부정적인 메세지를 담아 바코드로 인한 세상의 지배같은 내용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 영화를 떠올려보면 바코드가 일상이 된 작금의 현실이 그렇게 극한의 상황으로 다다르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를 하는 반면에 왜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보여주는 영화와 문학이 필요한지를 어렴풋이 이해가 가는 것도 같다. 자본주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자본주의의 이면에는 언제나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불평등 이념이 바탕이 되어 있고 급변하는 디지털 속도에 불안감을 감지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측정할 수 없는 미래는  말 그대로 "디스토피아" 를 느끼게 한다. 최근에 들어 급증하는 영화장르나 문학에서도 디스토피아를 주를 이루는 것 또한 그런 이유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상상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의 불안을 그대로 투영해주고 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양분화된 사회, 엘리트 집단만이 살아남은 미래속에서 약자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강자의 모습을 담은 디스토피아를 담은 소설 『퓨어 』는 기존의 많은 디스토피아 영화를 닮아 있다. 최근 개봉된 영화 『헝거 게임』과 비교하자면, 『헝거 게임』에서는 지배측이 군림하고 있는 도시를 '판엠'이라고 불렀지만, 『퓨어 』에서는 '돔'이라고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퓨어의 세상은 조금 더 진보적이고 앞선 테크놀리지의 세계라는 차이를 보인다.

 

 

태양에 태양에 태양을 더한 것 같았던 밝디밝은 빛같았던 '대폭발'이 일어난 후의 세계이다. 

돔에 살고 있는 이들은 '퓨어'라 부른다.

대폭발이 있은 후, 사람들은 딱 두부류로 나누어지게 된다.

바로 '돔'에 있는 사람과 '돔'밖에 사는 천민들.

돔은 천민들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으며, 언젠가 지구가 회복되는 날, 천민을 돌보며 새출발 할 것이라 믿는 이유는 , 대폭발이후 돔에서 날아온 종이(메세지)들 때문이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여러분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언젠가 우리는 '돔'에서 나와 여러분과 평화롭게 공존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멀리서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돔 밖의 세계는 강력한 군사 정권으로 인간 사냥을 즐기는 군인들이 존재했고,

대폭발로 인해 하늘에서는 늘 검은 재가 내렸고, 불에 타고 뒤틀린 생존자들은 몸이 성한 사람이 없었다. 화상과 흉터, 아니면 주위의 사물이나 짐승들과 융합된 사람들, 기형의 아이들, 새로운 기형의 종들이 출현하는 곳이다. 반면에 대폭발에도 살아남은 지배층들은 밖의 세계와는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살아가지만 , 지배층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완벽한 신분사회이다. 철저하게 교육되고 철저하게 연구를 바탕으로 우성인자만 존재하는 곳이 바로 '돔' 이다. 

 

 

대폭발 시에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있던 할아버지는 선풍기가 그대로 목에 박혀 죽을 때까지 한 몸이 되었다. 그런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영특한 손녀 딸 '프레시아'는 이제 곧 열여섯이 된다. 혁명군은 무조건 열여섯이 되면 아이들을 잡아가는데 이번에 그 명단에 포함된 프레시아는 할아버지의 죽음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감지한다.  장의사였던 할아버지는 이제는 산 사람의 살을 꿰매주는 일을 하고 프레시아는 근근히  작은 동물을 만들어 시장에 팔고 채소를 받아 근근히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나마 프레시아가 만드는 나비는 인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나비가 주는 생명의 몸짓이 희망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돔의 지도자층의 한 사람인 월럭스의 아들 '패트리지' 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호출을 받는다. 애정도 없고 살가움도 없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월럭스는 지배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차가움, 오만함, 매정함의 화신이다. 돔으로 들어오는 날 , 천민들을 구하기 위해 나갔던 엄마를  기억하는 패트리지는 엄마의 따스함과 아름다움을 기억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또한 돔에 있는 이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는 패트리지가 행동 코딩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계속된 실험을 하는데 행동 코딩에 문제가 생긴 것이 '어머니 ' 탓이라는 말을 흘린다.  우연히 엄마의 유품을 발견한 패트리지는 그 유품들을 보자, 엄마가 돔 밖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리고 돔 밖으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어렸을 때 늘 불러주던 엄마의 노래를 기억하며..

 

 

"항상 빛을 따라가렴. 네 영혼을 따라가렴.네 영혼에 날개가 있기를.

너는 내 길라잡이야."

 

 

 이후 펼쳐지는 세계는 숨막히도록  빠르게 전개되고 돔 밖으로 탈출한 패트리지가 프레시아와 만난 후의 행보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둘의 만남은  절망만 가득찬  세계에 희망을 주고 , 돔 안에서도 작은 변화가 꿈틀거린다. 혁명군에 의한  프레시아의 납치로 패트리지와 브래드웰은 또다른 진실에 접근하게 되는데, 브래드웰은  돔밖의 천민들 중에서도 지하세계를 조직하여 대폭발과 '돔'에 대한 환상과 통념에 반기를 든 인물이다.  이어 둘은  광활한 녹은 땅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힘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여자'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패트리지의 엄마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과정이 2권에 펼쳐질 예정이다.

 

 

소설에서 그리는 세계는 마치 핵 전쟁이후의 모습을 그린 느낌이다. 이런 상상속에  미래의 재앙은 현실이라는 화살을 겨냥한 것이다. 소설 속의 세계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은 기존의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그려진 익숙한 장면들이 떠오르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매력적인 등장인물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들을 억압하게 하는 것- 자유와 권력- 에 대항하여 싸우는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원자로서 스토리에 생명력을 부여해줌과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과 싸우는 전사의 모습이다. 디스토피아 문학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의 부조리를 극한 상황까지 끌어올려 상상하게 하여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데에 있다. 디스토피아는 먼 미래가 아닌 바로 현실의 울림인 것이다.

*2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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