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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독거노인이 사망한 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발견이 되었다. 군청으로 연락이 와 장례를 치러주게 되었는데 그 노인의 장판에서는 썩은 돈 3백만원이 나왔다. 장판에 돈을 숨겨 놓고 배고파 죽은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프다기 보다는 노인이 돈을 악착같이 모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가슴이 아린다. 그래서인지 독거노인의 죽음과 맞물려 이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라는 깊은 심연속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 '자본주의'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나 거대담론으로 파고들어간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와 거대담론으로서의 자본주의는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한다.그만큼 자본주의는 친숙하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으로서 자본주의를 철학자 강신주는 욕망의 집어등으로 표현하였다. 수많은 욕망, 우리는 하루 중에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그것이 물건이든 , 사람이든, 어떤 것이든 '욕망'에 지배받고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은 '나'를 위한 욕망일까? 아니면 '타자'를 향한 욕망일까?
『상처 받을 권리』에서 저자 강신주는 자본주의 체계를 해부하여 곳곳에 메스를 들이댄다. 자본주의 속에서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하는 거짓된 인문학보다는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인문 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친숙하고 평범한 삶을 낯설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여 있고, 그로부터 상처받는지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다행이도 문학과 철학자들로 인해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저자는 '행운'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삶’을 낯설게 보지 않고서는, 이 의식하기조차 두려운 상처를 치유하기란 난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상처 받을 권리』의 구성은 문학자 네 사람과 철학자 네 사람을 짝패로 하여 자본주의의 삶을 원초적으로 다가가게 한다. 이들의 삶과 문학과 철학에서 비롯된 '욕망'이라는 사유는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내면속에서 '진짜'를 찾게 해 주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이상 vs 짐멜),(보들레르 vs 벤야민),(투르니에 vs 부르디외),(유하 vs 보드리야르)
이상은 최초로 '돈'의 논리를 찾은 문학자로서 짐멜은 화페경제의 모순점을 지적한 철학자로서 짝을 이루어 '돈'의 지배를 받게 된 무의식의 트라우마를 말한다. 화폐경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이루어졌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와해시키고 , 오직 돈으로만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우리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에 산다는 것은 자본이 가져다주는 축복과 풍요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거기에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중의 하나인 사랑마저도 왜곡할 힘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독거노인의 죽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노인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오면서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돈을 가진 자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악착같이 돈을 모았을 것이다. 유년 시절에 겪었던 ' 경제적 트라우마'로 인해 자리잡은 '돈'이 절대적인 '힘'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인된 경제적 트라우마, 경제적 공포로 인하여 돈에 집착하였으나, 그런 돈의 공포로 인하여 결국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돈에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심리적인 메커니즘은 쇼핑, 주식, 펀드, 재테크 ,도박 등 '돈'을 향한 욕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는 19세기 파리를 매춘부와 같다고 묘사하였다.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성적으로 몸을 팔지 않았을 뿐 ,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말한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고통스러운 곳이기에 '종교'가 그들에게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벤야민은 돈이라는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 , 그리고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소망과 기대 심리가 인간에게 존재하였기에 자본주의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것으로 본다. '매춘'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통해 정당화되는 강간이라고 한다. 동시에 사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다고 한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산업자본주의의 화폐경제는 인간의 시간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미래를 '가능성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미래를 가능성의 장'으로 가장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계기로 바꾸었으며 이것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게 하는 진보성을 띠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종 목적이고 인간은 언제든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회. 만약 우리가 인간을 최고의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된다고 보았다.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모습을 벗어야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삶이란 연극에 불과하다는 통찰에 이른 철학자 에펙테토스는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인 연극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우리의 모든 욕망은 자아가 아닌 타자를 향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마주해야 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각인된 기존의 욕망들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힘에 의해 철저히 상처받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태어나면서 씌어지는 페르소나를 벗고 맨 얼굴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고 있는 삶의 모습을 저자는 면밀하게 살피고 그 상처를 마주보게 하여 상처를 '진정한 상처'로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하에 태어나 돈을 모으기만 한 채 죽어간 쓸쓸한 독거노인의 죽음이 그저 모르는 타인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