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책은 임마누엘 칸트의 역사 철학과 관련한 논문 모음집이다.


총 7가지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 페이퍼에서는 아래 두 가지 논문만을 다루기로 한다. 



1.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6. <다시 제기된 문제: 인류는 더 나은 상태를 향해 진보하고 있는가?






1. 인간은 도덕세계에 있기에 존엄하다



인간은 오묘하고 복잡한 존재다. 인류는 동물에서 시작하여 고등사유 능력을 가진 인격체로 진화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동물처럼 쾌락과 충동에 이끌리며 살면서도, 동시에 도덕법칙을 구축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당시 철학자들은 이를 두고 감각과 이성의 문제로 설전을 벌였다. 철학사에서 말하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두 전통이다. 칸트는 이성과 느낌에 각각 합당한 자리를 마련 하여[1], 인간이라는 이 복잡 미묘한 존재를 규명하려 했다.

 


칸트는 철저히 자연세계와 도덕세계를 엄격히 구별했다. 자연세계는 야생으로 식욕과 성욕으로 가득한 약육강식의 세계다. 이 세계의 지배원칙은 서슬 퍼런 발톱과 핏기어린 이빨에서 비롯된다. 본능과 충동에 따른 자연법칙이자 어쩔 수 없이 생명체에 내장된 타율법칙이다. 단지 동물들은 이미 주어진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법칙을 거스를 이성의 힘이 있다. 이는 곧 동물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도 대체로 동물의 법칙으로 일상을 영위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스로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본능과 충동의 법칙에 구속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지배할 자기헌법과 이성의 왕국을 만들 능력과 권리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특별하다. 날씨는 흐렸다 개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은 높았다 낮았다 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도덕세계를 직접 만듦으로써 스스로 존엄해진다.



[1표정훈.철학을 켜다. 을유문화사. 2013. p.230에서 인용

 




2. 용기있는 자가 자유롭다



칸트가 묻는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답 한다. 계몽은 어른이 되는 것이다. 계몽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대다수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성체로서 스스로 판단할 자유와 책임의 무게를 아는 것이다. 칸트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책임지고 판단하기 보단 권위 있는 타자에 의존하고 결정을 내맡겨버리는 것을 속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타고난 인간이 이성의 사용처를 스스로 막아버리는 이유는 무식하거나 지능이 낮아서가 아니다. 바로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홀로서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타자에 복종하고 지배받던 삶에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배할 헌법과 관리책임을 맡는다는 것 이 생소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동물적 복종의 세계에서 인간적 사유능력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 스스로 깨달아야한다. 깨달은 자는 박차고 나와야 한다. 도덕의 세계에서 자유의 주체로서 책임의 무게를 용기 있게 감수해야한다. 자유의 비결은 역시 용기뿐이다.






3. 자연인, 자유인 그리고 세계시민

 


칸트는 진보의 조건을 자유를 부여받은 존재의 행위로 보았다.[2]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보와 인류의 진보는 맞물린 것으로 보았다. 역사발전은 인류의 진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역사가 퇴보한다고, 또 어떤 이는 반복 된다 믿지만, 사실은 진보하고 있다. 인간 안에 이성의 불꽃이 잠재 되어있는 한, 진보의 불길은 언제고 일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보의 불길은 어떻게 확산되는가?

 


칸트는 인간을 3단계로 보았다. 인류는 동물의 법칙에 예속된 자연인, 용기를 통해 깨우친 자유인, 공적이성을 발휘하여 영구평화에 도달한 세계시민 순으로 발전한다. 그렇기에 칸트는 전쟁을 혐오했다. 전쟁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부추기며, 타락을 강제한다. 인간세상을 피투성이로, 도덕법칙의 세계를 야생의 세계로 퇴보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이 사라지는 영구평화의 세계를 꿈꿨고, 그것이 인류전체의 목표이며 결국엔 언젠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종단계는 전쟁이 멸종한 영구 평화시대의 세계시민이다. 생물학의 한 종으로서의 인류가 자유와 책임을 지는 사회적 어른으로, 그 어른이 다시 공적이성을 갈고닦아 세계시민으로 변증법[3]적으로 발전을 거친다. 즉 용기의 결핍을 극복하는 것이 자유의 확산, 공적이성의 보편화를 촉발 시킬 것이다. 전쟁을 저지르는 것이 동물적 본성이라면 평화를 창조하는 것은 인류의 능력이자 과제인 것이다.

 


보편적 도덕원칙은 머리를 공명시키고 가슴을 공감시킬 것이다. 보편적 도덕원칙이 보편적 통치원칙으로 제정되면 정언명법의 세계화가, 자연법의 보편화가, 만인의 만인에 관한 평화상태가 창조 될 것이다. 진보란 용기의 계몽이 자유를, 자유의 번식이 영구평화를 몰아오는 과정인 것이다정말이지 칸트의 꿈, 엄청나다.

 


[2]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역.칸트의 역사 철학. 서광사. 2015. p128 인용

[3] 본문에서의 변증법은 시대의 한계를 극복해나간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사용하였다.



※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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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8 15: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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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8 19: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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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라파르그는 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며 또 운동가다그는 마르크스가 생전에 그렇게 싫어했던 프루동주의자로 정치활동에 데뷔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와 교류한 뒤 정통 마르크스 주의자로 전향했다. 마르크스의 둘째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했고, 그 역시 엥겔스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69세가 되자 늙은 몸으로는 운동에 기여할 수 없어 아내와 동반자살로 인생을 마무리했다. 마르크스 일가에는 어떤 묘한 피가 흐르나보다. 그의 최후를 보면 나는 항상 그런 생각에 잠긴다.






1. 버티는 삶에 관하여

 


소제목이 쓰라리다. 안 해본 알바가 없었다. 젊은 날 뿐만 아니라 늘 빈곤했고, 커서는 자립해야만 했다. 돈이 급했다. 등록금이야 공부 좀 하고 장학금을 받으면 됐지만,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늘 문제였다. 야간 편의점·대형마트·예식장·뷔페·학원·이사 등 일거리가 있다면 닥치는 대로 뛰어들었다. 임금수준은 문제가 안 되었다. 일단 일거리가 있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했다. 시간당 만원을 넘어서게 받은 적도 있지만, 야간에 일하고도 푼돈 4천원을 겨우 넣은 적도 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육신이 고통스러웠던 노동은 설날을 대비하는 마트 알바였다. 앞에 다른 일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문제였다. 가령 친구는 유럽에 놀러가 있는데, 난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먼지나 들이 마시며 등짐을 질 때 빚어지는 그런류의 비애감이었다. 그러나 이 알바는 정말이지 45일간 육신이 녹아내리는 경험이었다. 슬플 겨를도 힘도 없었다. 12시간 노동이야기 하는데 나는 13시간을 했다. 매일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11시에 퇴근했다. 식사는 하루 30분씩 2, 물론 식대는 없었다.

 


6일을 꼬박 다 채워 일했다. 13x6, 무려 주당 78시간을 일했다. 버텨야 했다. 매일 걷는 길에 잠시 망각되었던 통각이 돌아왔다. 발이 저렸다. 발바닥이 항상 아파왔다. 걷는 게 고역이었다. 족저근막염을 앓았다. 자다가 늘 연필을 꽉 쥐고 쉴 새 없이 글을 쓴 것처럼 팔이 저려 깨길 반복했다.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식은 항상 자거나 목욕탕에서 근육을 풀어줘야 했다. 내 몸에 체취는 사라졌고 파스냄새가 대신했다. 하루하루가 소모전이었고 참호전 이었다. 버티는 삶의 연속이었다.

 


수십 번을 도망치고 싶었다. 탈주기도는 늘 머릿속에서만 그쳤다. 설령 도망친다 해도 세상이, 이 나라의 경제가 나를추노(追奴)’할 테니까. 이 상황에서 나는 개인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일 년에 40여권 가량 책을 읽는 본인은 단 한권의 책도 보지 못했다. 이렇게나 피곤하고 당장 아파 죽겠는데 잠이나 자야지, 책이 뭐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내가 알게 뭐람!’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래서 깨달았너무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사람은 체제의 변화와 부조리의 시정을 이야기할 여력도 관심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그래서 빈곤보수의 등장을 

깊이 있게 포착한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몰입해서 읽었다내 삶이 몸으로 깨달은 내용을 참 잘 정리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2. 자본주의 정신과 저주받은 노동윤리, 그리고 피로사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면, 사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그리 역사가 길지 않다. 지금이야 당연히 월급 오를 때 바짝 시간 늘려 일해서 최대한 많이 벌어두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월급이 오르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먹고 놀았다. 이윤보다는 자신의 삶과 만족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에세이 건투를 빈다에서도 이 같은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아테네 올림픽 때 만난 그리스의 어부는 고품질의 물고기는 자신과 가족이 먹고, 남은 물고기를 시장에 팔았다. 한다. 더 비싸게 팔아 돈 좀 더 안 벌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 보려는 오늘날의 사고방식과 반대였다. 무언가 어느 날 세상의 영혼통치술이 바뀐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항상 필요 이상을 생산한다. 체제의 소화력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증식욕구대로 무한정 제품들을 쏟아낸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휴식과 여가를 즐길 균형 상태를 이 체제는 허락하지 않는다. 과잉생산과 과잉공급이 야기한 불균형은 노동자를 굶주림으로, 자본가를 탐욕의 굴레로 밀어 넣는다. 노동자는 과잉 노동을 담당하고 자본가는 과소비를 도맡게 된다. 주기적 공황은 자본주의의 예고된 고질병이다.

 


기존의 좌파 이론가들은 자본가 계급이나 자본주의 구조자체에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파르그는 노동자의 잘못도 아울러 지적한다. 즉 노동자 스스로가 자본가 계급의 윤리의식과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스스로를 불구덩이에 경제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과소비와 낭비만하는 유한계급으로, 노동자는 생산의 고역을 담당하는 무산계급으로 불균등한 역할배분에 동조하고 부역했다는 것이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착취가 나쁘다면서 왜 그렇게 사람들은 착취(고용)당하길 원하는가?’ 라며 마르크스주의자를 공격한다. 라파르그는 잘못된 노동윤리가 퍼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노동윤리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동은 신성한것이며 게으름은 악이라는 자본가들의 윤리를 노동자계급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너도 나도 일단 앞뒤 재지 않고 일하려 들기 때문에, 항상 노동의 과공급이 발생하고, 노동조건은 계속해서 열악해진다. 일단 일부터 하자는 발상을 노동자 스스로 끊어야 이 바닥을 향한 경쟁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르트르 식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노동하도록 저주받은 존재다. 아니 자본주의 체제하의 인간은 노동하도록 세뇌당한 존재가 더 옳겠다. 우리는 항상 노동이 신성하다고 배웠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와 같은 직설적인 것에서부터, 세련된 포장지를 둘러싼 노오력자아실현까지 말이다. 특히 한국인은 더 그렇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 세계에서 밤낮없이 가장 열심히, 가장 오래 일하면서 노는데 죄의식을 느끼는 나라다. 이쯤 되면 노동윤리가 아니라 노동저주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런 라파르그의 문제의식을 물려받은 현대의 철학자는 한병철이다. 그는 자신의 저작 피로사회에서는 착취방식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기존의 착취방식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한경쟁을 강요하며, 기계에 의해 축출될 예비실업자들이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다. 새 시대에는 구시대적 계급착취에 새 시대적 자기착취가 포개졌다. 자기착취의 고리에 얽힌 자는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의 과다 지출을 내면화한다. 무비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무한경쟁에 스스로를 감사히내던진다. 병든 노동윤리는 이제 유한한 인간 존재를 환각시켜, 사람을 자본주의의 가미카제 전사로 탈바꿈 시킨다.


 


신자유주의가 탈구축한 한국은 피로사회다. 집단적 일중독 상태에 놓여있다. OECD 통계가 너무 많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는 공부하다 죽고 어른은 일하다 과로사 한다. 늙어서 폐지 줍다 병사한다. 그 과로할 일자리조차 없어 과로사 직행열차에 태워달라고 고용을 요구하는 형국이다. 이러니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도 부릴 수가 없다.

 


최근에야 한국에서도 게으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김정운 교수는 노는 만큼 성공한다에서 기존의 노동과 여가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비판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주장했다. 전쟁보다 자살과 과로로 더 많이 죽는 이 나라에서 위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직 한심한 전 정권의 여당 대표는 복지하면 국민이 게을러진다며 핀잔하지만 말이다.


 


3. 기계화 시대의 게으름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에세이 보다에 일본소설 한 구절을 인용했다. 너무 인상 깊었기에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이해가 안 되네. 로봇은 고장 나면 큰돈을 들여 고쳐야 하지만 나는 다쳐도 좀 쉬면 낫는데……. 게다가 건강보험도 들어있어 치료비도 거의 안 드는데, 웬만하면 값싼 나를 쓰지 우스우면서도 꽤 슬픈 이야기다.


 


기계가 발전하면 기계가 줄여주는 만큼 인간은 쉬고 놀아야한다. 라파르그는 하루 최대 3시간 노동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인간이 쉬는 만큼 기계의 힘이 메워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더 발전된 기계로 더 사람을 굴린다. 기계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인간은 즉각 교체된다. 기술발전과 기계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기계를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즉 기계의 증대된 생산력을 노동해방의 구세주가 아닌, 착취율을 증가에 앞잡이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노는 것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게으름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기에 라파르그식 진보는 본성 회귀적이다.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맡고 인간은 노동고역에서 해방된 뒤 자유로이 노니는 세상. 게으를 권리는 이른바 노동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뜻한다. 인간 본성의 회복이다. 기계로 인해 인간은 게을러 질 수 있다. 우리는 게으름을 위해 기계를 사용할 수 있다. 게으름은 축복이다. 기계는 모든 인간을 유한계급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문제의식을 여기에 집중해야한다.

 



4. 게으름은 진보의 원동력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말미암은 계급투쟁이야 말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 말했다. 진보의 원동력을 투쟁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베블런의 지적처럼 사람들은 피곤해서 투쟁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마르크스는 가뜩이나 피곤해 버티기에 급급한 노동자에게 투쟁까지 요구한 무심한 사람일 수도 있다. 라파르그의 말처럼 인간은 육체적 발전이 정점에 이르러야만 최상의 에너지와 도덕적 활력을 얻기때문이다. 피로에 찌들어 노곤한 육신을 달래기에도 24시간이 모자란 사람이나, 하루하루 밥벌이의 지겨움에 종속된 자는 버틸 뿐 발전할 수 없다.

 


역사발전 5단계 이론에서 다음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물적 잉여가 축적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무언가를 많이 생산해서 진보하던 시절은 지났다. 관념 차원에서의 진보역시 함께 가야한다. 정신적 잉여는 게으름이다. 게으름을 축적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즐기고 놀아야한다. 자본이 뭐라고 하든 말이다! 우리의 놀이와 작당에서 창조가 비롯된다. 21세기 게으름은 단순한 재충전과 재생산을 넘어 창조의 밑거름이다.

 


부지런의 대명사인 개미집단에조차 게으름뱅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쉴 새 없이 일하는 개미 중 20-30%는 놀고먹는다. 자연의 섭리는 이들에게도 역할을 부여했다. 이들이 놀아야 집단이 장기 존속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미가 일해 피로가 쌓일 경우,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 반면 게으른 개미가 한 축을 차지하는 집단은 변화에 유연하다. 덕택에 오래 존속 할 수 있다. 이렇듯 게으름은 유연성을 낳는다. 자연의 법칙이다.

 


신자유주의는 비효율을 적출해낸다고 하지만, 마른수건 쥐어짜기의 명백한 퇴보다. 위기에 한방에 무너지는 비상사태다. 사람이 어찌 무한정 전시상태로 살 수 있을까? 위기에 짓눌려 눈에 보이지 않는 평형수의 중요성을 간과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모두에게 부지런을 강요하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무한동력을 요구하는 현 체제가 개미집단에게 배워야 할 차례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어서 게으름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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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두툼한 폴라티와 검정 코트를 입고 약국에 갔다. 인간은 항온 동물이라는 생물학의 판정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추위에 약하다. 영하에 가까워질수록 골골대는 빈도가 높아진다. 이번엔 목감기다. 간단히 증상을 말하고 약을 받았다. 계산은 카드로 지불했다. 쌀쌀한 기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온성이 강한 털실들이 묘한 포근함을 자아냈다. 영수증을 건네받았다. 아 약값은 이제 엄마 카드의 범위가 아니구나. 이 정도는 스스로 지불하고 산 지 오래였다. 철없는 아들은 별것 아닌 일에 문득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대단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라한 삶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스무고개의 후반에 다다른 풋내기니까. 드러내놓고 주장할 업적도 없었지만, 덮어두고 부정할 실책도 저지르지 않았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자랐다. 항상 많은 것을 양보했고, 바라는 것을 바라기를 포기하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못 사는 집 중에서 가장 못 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 습관을 지니고 살았다. 그렇지만 올곧게 자랐고, 제법 명석해지려 노력했다.

 

스물하나부터 혼자 벌어 썼다. 아니 벌어 쓸 수밖에 없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고등학교 때는 돈 안 드는 게 공부랑 축구밖에 없어서, 그거 두 개를 열심히 했다. 공부 못하는 학교에서 전체석차로 수석 내지는 차석을 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개천의 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수를 했다. 수험기간 2년 동안 이혼소송과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야 했다. 유일하게 어려운 글을 읽을 줄 아는 내가 소송을 떠맡았다. 변호사 선임비가 있을 리가. 법률구조공단에 아쉬운 소리 해가며 겨우 작성했다. 이때부터 나는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며 살았다. 그 반대로만 살면 훌륭한 인생일 거야 하며. 그래서 나는 건국의 아버지도 싫어하고, 가부장제도 싫어한다. 오이디푸스를 사랑하고, 가끔은 사도세자를 연민한다.

 

그 뒤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편의점, 마트, 이삿짐, 웨딩홀, 뷔페, 학원, 피씨방 등등. 근로 장학생을 매 학기 했고, 상금이 걸린 대회만을 기다렸다. 경제적 자립은 고통스러웠고 또 자랑스러웠다. 벌이는 적고, 해외 한 번 못 나갔어도 나는 항상 떳떳했으며 품이 컸다. 없이 살았던 나는 항상 마음만은 부자였다. 내 주변엔 항상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인복은 타고났다. 친구들은 기꺼이 나를 위해 돈과 시간을 지불했다. 국가와 학교를 비롯한 공동체는 약간의 잔재주를 갖춘 나에게 격려와 장학금을 아끼지 않았다. 2년간 생활비로 1,200만 원을 받았다. 그 덕에 사랑도 해봤다.

 

인생의 불행을 몇 개 타고났지만, 못지않은 행운을 가졌다. 나에겐 쾌가 넘치는 웃음소리가 있었고, 그 웃음소리는 의기투합이 가능한 친구를 데려왔다. 친구들은 나보다 속이 깊었다. 한 놈은 나보고 돈 때문에 공부 포기하지 말라며 20만 원을 보내놓고는 군대로 도망가 버렸다. 또 한 놈은 문제집을 주워 푸는 걸 보고, 당해 EBS 문제집 전권을 사놓고 집 문 앞에 두고 갔었다. 다른 친구는 어머니 교통사고 수습을 그냥 도와줬다. 콜라 귀신인거 알고 기숙사에는 콜라가 몇 상자씩 보내져있기도 했다. 대학 선배는 책을 사주고, 외투를 사줬고, 다른 학교 친구 놈은 양복을 해 입혔다. 이른바 내 인생은 자랑스러운 협찬 인생이었다. 나를 늘 지지해주는 동료 및 선후배들에게 매번 살갑게 연락하지 못해 잠깐 미안했다. 그래도 나 사람장사는 참 잘했다는 자아도취를 여기서 안 하면 어디서 한번 해볼까. 뭐 여하간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니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도서관에 자리가 없어, 근처 카페로 밀려 나왔다. 삶을 돌이키게 된다. 내가 존경했던 한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도리어 내 인생을 반추해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언가를 읽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사람을 찾는다. 동안의 외모에 애늙은이 같은 정서를 가졌고, 본인 스스로 외모에 꽤 만족하고 산다. 키까지 컸으면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킬 뻔했다. 삶이 아름다워서라기 보다는 사람이 좋아서 산다. 아마 나는 개의 방정맞은 꼬랑지를 가진 늑대의 일족이 아니었을까. 자기소개 끝.

 

-2017. 11. 14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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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14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있다. 내실 있는 글은 그야말로 내실에서 나오는군요.....

프리즘메이커 2017-11-15 14:48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syo님을 만난것도 제 인생의 행운!

sprenown 2017-11-15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이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는 건가요? 낙장불입! 기대됩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1-15 14:48   좋아요 0 | URL
헤헤 무섭습니다..힘내겠습니다!
 



















박홍규 교수의 조지 오웰은 써야할 글에 참고할 게 있어서,

김시덕 교수의 책은 그 특유의 통찰력 때문에,

징비록은 서평하려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예뻐서,

샀습니다.

책 지를 때가 제일 행복해요.

(책꽂이 용량이 초과..라는 게.. 함정..)



+ 사은품은 

알라딘 스탠리스 머그컵..

알라딘은 정말 지갑 도둑.



2017.11.13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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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쓰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전체적인 얼개를 그리고 있는데,

 도무지 마무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햇병아리 정치학도 시절의 내가 

13년에 남긴 글귀를 발견했다. 

 

문제가 말끔히 풀렸다.

그 때가 지금보다 영혼이 깨끗했나보다.


2017.11.09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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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11-09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평 기대됩니다. ^^
제게도 애증이 엄청 많은 책이라...ㅎ

프리즘메이커 2017-11-11 23:50   좋아요 1 | URL
제가 게으름을 부리느라 이제 봤네요 ㅠ ㅋㅋㅋ열심히 써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