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픈 일이 있어야 슬픔이 찾아오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찾아왔다는 것은 돌아갈 것이라는 기약과 한쌍이기 때문입니다.
제때 항복하지 못한 패잔병은 막다른 길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차라리 혁명을 열심히 할걸!" 공무원 시험에 수차례 낙방한 친구 녀석의 눈에는 공허함이 숱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잔에 투명한 술을 잔뜩 털어주었습니다.
초점을 잃은 사람의 눈은 오드아이가 아니었습니다. 통일된 흑갈색 눈이 빛에 많이 삭아 희미해졌습니다. 역시 빛과 희망은 강렬하고 또한 악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꿈을 꾸게 하니까요. 글쎄 그만 저는 그에게 서툰 동정을 들키고야 말았습니다. 미안함을 씻고자 샤워기가 뿜어내는 뜨거운 물을 거울에 힘껏 쏘았는데, 매끈해진 거울이 끈적하게 말하더군요.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2.
사람은 한번도 패배해보지 않고도 패배주의자가 될 수 있는 지적 생물체입니다. 포기도 도전도 하지 않는 방법은 역시 비겁하게 현실을 연장하는 방법입니다. 거기 눌러 앉아 상실한 의지를 껴안고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늘려놓고도 그 현실을 미워하며 부정하는 일입니다.
살다보면 노는 게 무섭고 지겨워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래서 늘 하던대로 도망쳐야지 마음을 굳게 먹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도망을 단념합니다. 숨차는 것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저앉아 세상에 굴복하는 과정은 항상 이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다시 기회가 주어진들, 안도하기 보다는 덜컥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게지요.
남들 보다는 잘하고야 말겠다는 치기의 투사들은 어느새 보통과 평범과 평균의 무게에 짓눌리고 맙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다시 준다 한들, 또 몇 번을 과거로 되돌아 간다고 한들 더는 해낼 자신이 없다는 의지의 쇠락에 빠지고 맙니다. 철저하게 무력하고 지독하게 권태로우며 노력보다 잔꾀를 다독이는 총체적 무정부상태 말이지요.
상투적인 표현은 정말 싫지만 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입니다. 더는 자신이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과정입니다. 살아보니 별 수 없구나. 그렇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고 신나는 일이 쪼그라든 채 사회에 녹아버리면, 비로소 청춘은 사회인으로 징집됩니다. 요새는 예비 사회인의 복무 대기줄도 꽤 길다고 합니다.
3.
삼수를 하던 시절의 고민은 세상에 나를 받아줄 학교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더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외로움, 세상에 내가 머물 곳이 줄어든다는 막막함 따위로 재현되었습니다. 지금은 존재증명에 실패할까 전전긍긍해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감히 미래를 예측하려 드는 습관과 결별해야한다고 합니다. 불확실성으로 머리가 가득차 버리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비우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농구공을 천 번쯤 땅에 튕긴다거나, 무의미한 낙서따위를 끼적이며 인지하지 못하는 반복을 계속하는 것이지요. 머리를 식힌다고도 하던데,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머리로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가슴이 받질 못하는 게지요. 공부하는 방법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소망이 떠나버린 자리에는 연민만이 남아버렸습니다. 역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가여워 하기로 했습니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시시한 인생이라 생각이 들 때 마다 있는 힘껏 자신을 가여워 하기로 했습니다. 사랑보다는 그게 쉽고 더욱 필요한 일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존재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상실에 익숙해지면서 말입니다. 나의 존재 증명 방식, 그것은 바로 글쓰기입니다. 펩시콜라를 기다리는 북극곰처럼,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서 어쩔줄 몰라하면서 말입니다. 탄산이 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연민의 시간>_2019.05.21 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