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1993
※ 본 감상문에는 내용상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혐오가 광기를 낳는다. 광기는 이성을 표백 시킨다. 그 시대 나치의 만행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다.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악이 평범해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아이히만 같이 열심히 살아가는 순진한 살인기계들이 도처에 널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 반대 케이스를 말한다. 오스카 쉰들러의 이야기다.
인생을 방탕한 호색한으로 살아왔던 쉰들러는 야수적인
본능으로 시대의 돈 냄새를 맡는다. 전쟁과 유대인, 그리고
돈이 겹쳐 보인다. 그는 노벨 기회주의상이 있다면 반드시 수상했을 만큼, 특유의 넉살과 수완을 통해 군납 사업체를 꾸린다. 유대인 회계사 슈텐에게 실무를 맡기고 본인은 나치 간부와 군부를
뇌물과 향락으로 구워삶는다. 나치 독일이나 현대 한국이나 상관없이, 군납하면 3대가 먹고 사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쉰들러는 일약 갑부로 도약한다.
▲흑백영화의 유일한 칼라, 붉음.
피를 상징하는 색, 인간의 몸 안에 흘러 박동하는 색, 인류애를 각성시키는 색
(사진 출처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id=2043184)
벌어놓은 돈으로 승마를 즐기던 쉰들러는 유대인의
재산을 빼앗고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흑백영화에 유일하게 컬러로 등장하는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주검으로 발견된다. 쉰들러는 흔들린다. 마음에 무언가가 밟힌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때로는 부정하지만, 점점 더 진심으로 유대인들을
도와주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기회주의적 수완가가 양심을 장착했을 때의 진수를 보여준다. 독일 장교를 눈속임하던 로비 능력이 졸지에 구원의 능력이 된 것 이다.
그렇게 쉰들러는 1100명의 유대인을
구했다.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했고, 막심한 적자를 감수하며
구해냈다. 전쟁이 끝나자 기업은 도산했다. 그 동안 획득했던
모든 부를 잃었다. 이제 쉰들러는 나치당원이자 군납기업 대표로서 도망 쳐야 할 전범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더 구하지 못했음을 계속해서 후회했다. 늦게 깨달은
자신을 책망했다. 앞서 말한 아이히만은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무죄를 항변했다. 그런 그에게 어려운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쉰들러의 존재자체가
당신에게 반례라고 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혹자는 쉰들러가 한 것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일이었다고
절하한다. 본인은
동의하지 않는다. 폭력적인 구조와 시대 속에서 나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고 본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개인이 양심을 발현하여 비뚫어진 시대의 빛이 될 수도 있음을 쉰들러는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미친 세상에 제 정신인
사람은 부패한 기회주의자였으니까. 역으로 부패한 기회주의자라도 의인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니까.
▲가자지구 폭격을 구경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유난히 이스라엘 국기의 푸른 빛이 돋보인다.
영화가 묘사했던 마무리, 쉰들러의 죽음을 추모하며 돌을 놓고 가던 유대인들의 행렬.
빨간 코트와 푸른 별은 무엇을 대비하고 있을까?
(사진출처: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6295436)
다만 오늘 날, 그의 의로움이 퇴색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과거 나치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던 장면과 오늘 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폭격하며
환호하는 장면이 겹친다. 나치즘과 시오니즘. 이 분노와 증오의
샴 쌍둥이는 묘하게 이스라엘로 전해졌다. 이들은 쉰들러를 추모하면서,
아이히만의 길을 택했다. 생각 없이 살육하고 환호한다. 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죄 없이 죽고 있다. 이스라엘은 역사를 망각하고 증오만을 기억했다.
세상의 모든 차별은 혐오를 낳는다. 혐오는
분노와 증오를 먹고 자라 광기가 된다. 미친 세상은 항상 약자를 표적해서 가격한다. 나는 역사를 그런 방식으로 읽는다. 그리고 항상 나를 반추한다. 내가 미쳐 약자를 때린 건 아닐지. 또 우리 사회를 반성한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이 멸시와 혐오의 표적이 된 것을 보면 우리는
다같이 미친 것 같다. 한 어른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잊자. 우린 역시 아이히만이다. 유대인들이 나치를 망각했듯이. 우리는 그렇게 잊으며 산다.
2017.11.18
@PrismMa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