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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있는 책의 원고가 교정작업에 들어갔다. <여문책>에서 내 첫 책이 나올 예정이다. 20대 청년의 눈으로 세상과 고전을 읽는 일종의 인문 에세이다.
 
책을 내면서 많이 배운다. 책 한 권에 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책 한 권 나오는데 여러사람의 상당한 노동이 들어간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고 있다. 책을 읽기만 할 때는 전혀 몰랐었다.
 

편집 과정에서 지적해주신 내용이 무척이나 도움이 된다. 나의 잘못된 글쓰기 습관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논문을 쓰다보니 번역투가 옮아 간 것들이나, 불분명한 표현들을 잘 잡아주셨다.
 

스무 살의 목표는 딱 두 가지였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내 이름으로 된 논문 한 편과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보이는 것. 대학원 휴학을 하면서 원고를 써 작년 여름에 출간계약을 했고, 이제 고지가 눈 앞에 있다.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정말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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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된 세상의 비릿한 죽음을 애도하며


언젠가 평론가 신형철이 이렇게 말했다. 죽은 노무현은 희화화할 수 있어도, 노무현의 죽음은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극단적인 폭력이자 시신의 훼손이라고 말이다. 이 한 구절을 두고 나는 한국 사회의 몇 가지 도착과 그 비극적 결말을 떠올린다.

먼저 사퇴한 조국을 비웃을 수는 있어도 조국의 사퇴는 비웃을 수 없다. 개인으로서 조국 일가가 몇몇 얄미운 짓으로 인한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면야 충분히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개혁을 하려다 개혁대상의 폭력적인 압력에 못 이겨 물러난 그의 사퇴를 조롱할 수는 없다. 사퇴한 조국은 흠결 있는 개인이지만, 조국의 사퇴는 기득권에 의한 개혁 의지의 축출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있다. 설리의 죽음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나아가 한국 사회가 낳은 비극이다. 그러나 언론이 죽은 설리의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행위는 그보다 더 큰 비극이다.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비윤리다. 아니 몰윤리다. 이는 한 인간의 죽음을 극단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이자, 개념으로서의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망가뜨리는 행위기 때문이다. 사체를 전시하여 돈벌이로 삼는 짓은 결코 언론의 자유가 될 수 없다.

또 하나의 비극이 더 발생했다. 구하라의 죽음이다. 노무현의 죽음과 조국의 사퇴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면, 이 두 죽음은 사선의 근처에 있던 모두가 염려하던 예견된 죽음이었다. 우리 사회 모두가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연이어 목격하였다. 끝끝내 82년생 김지영에게 부정했던 혐오는 94년생 설리와 91년생 구하라에겐 엄연히 실존했던 폭력이었다. 죽은 구하라는 법의 '복수'를 기대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와 자유로운 인신공격, 죽음으로 이끈 표현과 죽음이 다 표현하지 못한 이 세상의 부조리들. 도착된 세상에서 죽어가는 이들과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비릿함. 인터넷의 몇 바이트 남짓한 활자가 그녀들의 가슴에 남긴 것을 보아라. 우리 시대의 칼은 6인치의 액정과 108자의 키보드다. 연예인은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였고, 악플은 산업재해였다.


정치의 발전은 누군가를 축출해서, 의식의 발전은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쫓아야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왜 이 세상은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을 세상에서 쫓아내고자 하는가. 왜 자꾸 세상은 누군가의 부재로 존재의 소중함을 깨우치려 하는가. 죽음이 윤리의 교본이 되기 전에, 윤리가 죽음을 막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또 한 번 보아라. 모든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 시대 어느 한 귀퉁이가 썩어가는 대한민국에서 모두들 안녕들 하시길 바란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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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고문입니다. 

<반일 종족주의> 이전부터 한번 총체적으로 정리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5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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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치하겠다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양복 차림일까? 교복도 자율화가 이루어진 마당에 ‘양복의 교복화’ 현상이 눈에 자꾸 밟힌다. 두발 규제도 사라진 마당에 2대 8의 머리칼 분배는 국정 가르마라도 되는 것인가. 도덕 교과서적인 발성법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연장자를 예우하고자 빼입었다는 궁색한 대답은 듣고 싶지가 않다. 청년 세대의 정치혐오를 생각할 때면, 나는 왜 정치 지망생들의 차림새부터 떠올리는 것일까?




정치가 영화와 닮았다면, 정치 지망생들도 ‘정치인’이라는 캐릭터를 해석한다. 문제는 그 해석이 양복에 갇혔다는 것이다. 빈약하고 획일적이며 낡은 내가 난다. 으레 정치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지레짐작들이 모여 굳어진 일종의 업계 상식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눈여겨볼 점은 젊은 정치 지망생이 기존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오히려 강박적으로 선호한다는 점이다. 다 큰 어른에 대한 복장 지적이 양복이 상징하는 비릿한 청년 정치의 한 단면으로 드러났으면 한다.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가장 기분 나쁜 순간은 “시장은 유능하고 정치는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다. 그러나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있노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최소 인재풀에서 만큼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시생이 시험공부를 할 때, 취준생이 사회 경험을 쌓을 때, 정치 지망생은 자신의 시간을 어디에 투자했을까? 행사에 기웃거려 가방을 들고, 술잔을 따르며 불콰한 사진 찍는 허드렛일 외에 특기할 것이 없다. 이른바 ‘존재 노동’도 노동이라면 노동이지만, 이력서의 공란처럼 헛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 일회용 존재 노동의 필수품이 양복이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청년 정치 지망생은 동년배 취업 준비생보다 확연히 스펙과 역량이 뒤떨어진다. 사실 청년이라는 기회를 이용했으나 사실 그게 전부기 때문이다. 어리다고 하대 받을 이유가 없다면, 사실 젊어서 우대받을 이유도 없다. 젊음은 사회가 특별히 배려하는 하나의 상태일 뿐이지, 정치의 이유나 자격이 될 수 없다. 생물학적 청년이 꼭 청년의 사회 문제를 잘 푼다는 보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귀속된 정체성이기보다는 자질과 능력이다. 무엇이든 업(業)이 되려면, 시각이 독특하거나, 컨텐츠가 새롭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남들 하는 것을 더 잘해야 한다. 정치도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청춘이면 아파야 한다로 둔갑하더니, 청년 정치가 필요하다니까 정치 청년들만 몰려온다. 청년성을 양복에 포장하는데 급급한 정치풍토의 범람에서, 나는 공부하는 청년 정치인을 보고 싶다. 기성 정치인은 학창 시절 사회 운동에 전념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손 쳐도, 우리가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의 정치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자기자본과 원천기술 없는 기업이 오래 버티지 못하듯이, 자기 분야가 없는 청년 정치인이 자라 정치 자영업자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청년을 위한 것과 청년에 의한 것은 다른 개념이다. 준비 부족이 기회 부족의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세상이 청년 정치를 일회용으로 소비할지라도, 정치 지망생들은 배움을 멈춰선 안 된다. 그래서 한 정치학도가 다른 정치 지망생들에게 감히 고하고 싶다. 취준생들과 자신을 구별 짓기 전에, 최소한 취준생만큼은 공부하시라고. 적어도 알맹이 없는 정치의 시대는 우리 손으로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나호선(정치외교학 석사 17)  press@pusan.ac.kr


<저작권자 © 부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_ 본문은 필자가 <부대신문>에 보낸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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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일 종족주의>에서 군데군데 녹아있는 묘사처럼, 조선시대에 여성인권, 특히 시골처녀들의 인권이 극악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유교 근본주의에 희생된 여성들이 시골농촌이라는 폐쇄적 우물에 갇혀 온갖 잡일을 도맡아했던 것은 아마도 안타깝고 부끄러운 사실이었을 것이다.
 
당대 여성들에게는 혼인 선택권도 없었고, 가정폭력도 심했을 것이고, 항상 가난했기에, 입이라도 덜자는 가족의 결단에 제일 먼저 집에서 방출되어 돈벌이의 역마살에 떠돌아야 했던 처지였을 것이다. 이렇듯 위안부-정신대 문제에는 민족 요소만큼 젠더 문제가 상당부분 들어가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날의 지방의 여학생들이 서울로 떠나고 싶듯이, 해외를 선망하듯이, 당시의 조선 처녀들도 시골과 집구석이라는 지옥을 떠나고 싶어했을 것이다. 시대가 하수상하여, 그것을 교묘하고 악랄하게 이용해먹고, 남의 비극을 팔아 장사하던 브로커들이 있었을 것이고 배움이 모자라거나 세상을 잘 알지못한 어린 처녀들, 혹은 아버지나 집안의 성급한 결정따위로 인해 발을 떠난 처녀들의 숱한 동기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납득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다.
 
  
2. 
 
그렇게 가난과 가정폭력을 피해 열악한 환경을 탈출한 처녀들은 한마디로 취업사기를 당했다. 오늘날에도 가출한 여중생이 성매매로 이어져 인격을 파괴당하듯이, 취업사기의 끝은 인신매매였으며, 본질적으로 전쟁과 식민지라는 거대폭력에 저항할 수 없는 성적인 착취였다. 미국의 노예 12년 처럼 밧줄에 채찍을 가해야만 꼭 노예인것인가. 노예와 노동자의 차이를 모르거나, 그런 구분따위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가능한 발상인가 싶다. 
 
작은 비극을 피하려다 더 큰 재앙을 만난 이들의 서사가 어떻게 '자발적' , '설렘', '로망', '고수익 직장' 따위로 포장되고 단정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란 말인가. 비극 앞에 나타난 또 다른 비극은. 비극의 허위를 증명하는 사료가 아니라, '비극의 중첩'을 나타내는 또 다른 증거일 뿐이다. 일반적인 수난을 교묘하게 덧칠해서, 작달만한 능동성을 부각해 시대적 참상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이영훈 류의 헛소리에는 평소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가 녹아있어 정말 역겨울 따름이다.
 


3. 
 
이 책에선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말을 아주 중요한 사실로 다룬다[pp.347-351]. 그것은 팩트가 맞다. 그러나 이 책은 한 사람의 과장된 거짓말이 어떻게 시대의 왜곡으로 이어지게 되는지에는 납득할 설명을 고의적으로 누락하고 있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노예 이미지는 노예사냥식 강제연행의 참거짓이 아니라, 성착취라는 본질적 요소 그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후의 서술은 독자로 하여금 아래와 같은 생각으로 이끌도록 몰아간다. 아 물론, 자칭 보수 유튜버들과 논객, 지식인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내가 추정한 내용임을 알린다.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이 부각되어, 피해사실이 신격화 되었는데 그 타이밍이 묘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잠자코 있다가 90년대 갑자기 등장했다. 그래서 그 갑작스런 등장이 혹여나 정치적 선동목적의 기획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여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은 역사문제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함으로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고 말이다.
 
여기에도 큰 맥락이 누락되어 있다. 한국이 식민지 배상문제를 폭력적으로 마무리지은 한일 협정이 박정희 정권 때였고, 그 연장선인 전두환 - 노태우 군부정권이 92년까지 이어졌으며, 성노예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사회통념상 어려운 시대였으며, 그 사이 민주화가 있었고,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90년대 김영삼 정권에서 일어났으며, 위안부할머니들 분들이 인생을 정리할 노인이 되어 비로소 발언할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생각은 전혀하지 못한다. 
 
그 대신에 그녀들이 타협없는 강경한 근본주의로 인지되도록, 그래서 현실의 정치에 압력을 행사하여, 마치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막후 실력자인양 자연히 몰아가고 있다고 보인다.
 
위안부 정신대 할머니들이 근본주의였다면, 정말 폭탄이라도 들고 대사관으로 달려가 '지하드'를 벌였을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도 거짓이다. 신문기사 조금만 검색해봐도 나온다. 할머니들이 권력을 쥐었다면, 역사문제가 이랬겠나? 자기 주장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평화적인 시위조차 강성으로 몰고, 항의조차 근본주의로 몰아가는 평소의 인식이 반영 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4. 
 
정리하자면, 이쪽 계열의 학자들은 항상, ① 사소한 거짓을 발견하고 ② 그 사소한 거짓을 부각해 전체적인 맥락을 도외시하며 ③ 사회과학적 개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④ 사실은 우리가 거짓 신화 속에 살아왔다 선동한다. 한마디로 침소봉대가 아니라 침대봉소인 것이다.
  
나도 극일은 경계한다. 한일관계의 전환을 일으킨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을 정말 높이 평가하고, 이전에도 현정부가 지나치게 대일외교를 직선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는 시각을 내비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다. 아무리 학문의 자유에 성역이 없다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 못해 상처를 입혔다면, 해명보다 사과가 먼저였을 것이다. 자유에 성역이없다면 책임에도 성역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상식이다. 
  
일제시대를 미화하는 것과 건조하게 그대로 인식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조한 인식에는 문학적 표현이나, 흥분-욕설, 비유따위가 필요하지도 않다. 학문적인 자세도 아니다. 
  
피해사실의 신격화를 경계한다면서 막상 피해자의 마음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도덕적 단죄에 저항한다면서, 먼저 도덕적인 공격을 가했다. 정당방위란 무엇인가. 학술적인 이야기라 해놓고 곳곳에 문학적 표현들이 눈에 보인다. 사회과학에서 '문학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모욕인지 아는 사람들이 저런다. 
   
박해에서 신앙이 깊어지고, 깊은 신앙이 순교로 이어지려는 모양이다 보니 아예 평정심을 잃어버린 것 같다. 이영훈의 전작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래도 나름대로 참고할 부분이있는 학문적 최소요건을 갖춘 책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흑화의 끝. 졸작이라 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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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눈당달이 2019-08-2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가지 팩트와 데이터에 기반한 결론이 서평을 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영훈 교수가 이 책을 사회과학 학술서로 썼다고 명시한 적도 없는데
사회과학서에 문학적 표현을 썼다고 극렬히 비난하는 것은 쉐도우복싱일 뿐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그동안 좌파들이 여러 문학, 영화,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온 일본에 대한 악마적 이미지가 거짓이었음을 처음으로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 서평을 졸작이라 평하겠다.

유동국 2019-08-20 15:37   좋아요 5 | URL
이 사람이 생떼를 쓰는 것을 보니 잘 쓴 서평이 맞다.

프리즘메이커 2019-08-21 17:27   좋아요 2 | URL
˝우리가 오로지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범했을 수 있는 잘못에 대한 엄정한 학술적 비판입니다˝ -<반일 종족주의> , p.5 책머리에서 이영훈

프리즘메이커 2019-08-21 17:28   좋아요 2 | URL
이영훈씨가 책에 직접 밝히셨는데, 댓글 다신분은 책은 읽으시고 비판을 하든 옹호를 하건 댓글을 다셔야죠. 얼른 독서하십시오.

연짱 2019-08-25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마침 ‘그것이 알고싶다‘에 이영훈씨 외 이승만학당 일원들이 나왔습니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을 만든 조각가가 강제 징용을 상징하는 여러가지 요소를 상징적으로 반영하여 정해진 모델없이 만들었다고 말하는데도 그들은 모델이 자꾸 일본노동자라고 우깁니다,,만든 조각가가 아니라는데 자기들이 생각하고싶은대로 추측하고 뱉는것이지요..또, 15세에 위안부로 끌려가셨던 할머니께서 그때를 기억하시는데..그들은 위안부가 20세 이상의 여성만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당사자 분들이 떡하니 계시고, 그날의 회상하는데도요..그들은 위안부할머니들의 기억 왜곡 가능성, 사회가 바라는대로 기억할 가능성을 주장합니다..같은 국민으로써 부끄럽고 참담합니다..저런인간들이 교수라고..ㅋㅋ

연짱 2019-08-25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영훈은 자아가 두개인가봅니다.

연짱 2019-08-25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youtu.be/1PGzh_RuA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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