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라파르그는 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며 또 운동가다. 그는 마르크스가 생전에 그렇게 싫어했던 프루동주의자로 정치활동에 데뷔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와 교류한 뒤 정통 마르크스 주의자로 전향했다. 마르크스의 둘째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했고, 그 역시 엥겔스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69세가 되자 늙은 몸으로는 운동에 기여할 수 없어 아내와 동반자살로 인생을 마무리했다. 마르크스 일가에는 어떤 묘한 피가 흐르나보다. 그의 최후를 보면 나는 항상 그런 생각에 잠긴다.
1. 버티는 삶에 관하여
소제목이 쓰라리다. 안 해본 알바가 없었다. 젊은 날 뿐만 아니라 늘 빈곤했고, 커서는 자립해야만 했다. 돈이 급했다. 등록금이야 공부 좀 하고 장학금을 받으면 됐지만,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늘 문제였다. 야간 편의점·대형마트·예식장·뷔페·학원·이사 등 일거리가 있다면 닥치는 대로 뛰어들었다. 임금수준은 문제가 안 되었다. 일단 일거리가 있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했다. 시간당 만원을 넘어서게 받은 적도 있지만, 야간에 일하고도 푼돈 4천원을 겨우 넣은 적도 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육신이 고통스러웠던 노동은 설날을 대비하는 마트 알바였다. 앞에 다른 일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문제였다. 가령 친구는 유럽에 놀러가 있는데, 난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먼지나 들이 마시며 등짐을 질 때 빚어지는 그런류의 비애감이었다. 그러나 이 알바는 정말이지 45일간 육신이 녹아내리는 경험이었다. 슬플 겨를도 힘도 없었다. 12시간 노동이야기 하는데 나는 13시간을 했다. 매일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11시에 퇴근했다. 식사는 하루 30분씩 2회, 물론 식대는 없었다.
주 6일을 꼬박 다 채워 일했다. 13x6, 무려 주당 78시간을 일했다. 버텨야 했다. 매일 걷는 길에 잠시 망각되었던 통각이 돌아왔다. 발이 저렸다. 발바닥이 항상 아파왔다. 걷는 게 고역이었다. 족저근막염을 앓았다. 자다가 늘 연필을 꽉 쥐고 쉴 새 없이 글을 쓴 것처럼 팔이 저려 깨길 반복했다.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식은 항상 자거나 목욕탕에서 근육을 풀어줘야 했다. 내 몸에 체취는 사라졌고 파스냄새가 대신했다. 하루하루가 소모전이었고 참호전 이었다. 버티는 삶의 연속이었다.
수십 번을 도망치고 싶었다. 탈주기도는 늘 머릿속에서만 그쳤다. 설령 도망친다 해도 세상이, 이 나라의 경제가 나를‘추노(追奴)’할 테니까. 이 상황에서 나는 개인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일 년에 40여권 가량 책을 읽는 본인은 단 한권의 책도 보지 못했다. 이렇게나 피곤하고 당장 아파 죽겠는데 잠이나 자야지, 책이 뭐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내가 알게 뭐람!’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너무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사람은 체제의 변화와 부조리의 시정을 이야기할 여력도 관심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빈곤보수의 등장을
깊이 있게 포착한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몰입해서 읽었다. 내 삶이 몸으로 깨달은 내용을 참 잘 정리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2. 자본주의 정신과 저주받은 노동윤리, 그리고 피로사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면, 사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그리 역사가 길지 않다. 지금이야 당연히 월급 오를 때 바짝 시간 늘려 일해서 최대한 많이 벌어두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월급이 오르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먹고 놀았다. 이윤보다는 자신의 삶과 만족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에세이 『건투를 빈다』에서도 이 같은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아테네 올림픽 때 만난 그리스의 어부는 고품질의 물고기는 자신과 가족이 먹고, 남은 물고기를 시장에 팔았다. 한다. 더 비싸게 팔아 돈 좀 더 안 벌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 보려는 오늘날의 사고방식과 반대였다. 무언가 어느 날 세상의 영혼통치술이 바뀐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항상 필요 이상을 생산한다. 체제의 소화력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증식욕구대로 무한정 제품들을 쏟아낸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휴식과 여가를 즐길 균형 상태를 이 체제는 허락하지 않는다. 과잉생산과 과잉공급이 야기한 불균형은 노동자를 굶주림으로, 자본가를 탐욕의 굴레로 밀어 넣는다. 노동자는 과잉 노동을 담당하고 자본가는 과소비를 도맡게 된다. 주기적 공황은 자본주의의 예고된 고질병이다.
기존의 좌파 이론가들은 자본가 계급이나 자본주의 구조자체에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파르그는 노동자의 잘못도 아울러 지적한다. 즉 노동자 스스로가 자본가 계급의 윤리의식과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스스로를 불구덩이에 경제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과소비와 낭비만하는 유한계급으로, 노동자는 생산의 고역을 담당하는 무산계급으로 불균등한 역할배분에 동조하고 부역했다는 것이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착취가 나쁘다면서 왜 그렇게 사람들은 착취(고용)당하길 원하는가?’ 라며 마르크스주의자를 공격한다. 라파르그는 잘못된 노동윤리가 퍼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노동윤리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동은 신성한것이며 게으름은 악이라는 자본가들의 윤리를 노동자계급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너도 나도 일단 앞뒤 재지 않고 일하려 들기 때문에, 항상 노동의 과공급이 발생하고, 노동조건은 계속해서 열악해진다. 일단 일부터 하자는 발상을 노동자 스스로 끊어야 이 바닥을 향한 경쟁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르트르 식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노동하도록 저주받은 존재다. 아니 자본주의 체제하의 인간은 노동하도록 세뇌당한 존재가 더 옳겠다. 우리는 항상 노동이 신성하다고 배웠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와 같은 직설적인 것에서부터, 세련된 포장지를 둘러싼 ‘노오력’과‘자아실현’까지 말이다. 특히 한국인은 더 그렇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 세계에서 밤낮없이 가장 열심히, 가장 오래 일하면서 노는데 죄의식을 느끼는 나라다. 이쯤 되면 노동윤리가 아니라 노동저주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런 라파르그의 문제의식을 물려받은 현대의 철학자는 한병철이다. 그는 자신의 저작 『피로사회』에서는 착취방식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기존의 착취방식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한경쟁을 강요하며, 기계에 의해 축출될 예비실업자들이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다. 새 시대에는 구시대적 계급착취에 새 시대적 자기착취가 포개졌다. 자기착취의 고리에 얽힌 자는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의 과다 지출을 내면화한다. 무비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무한경쟁에 스스로를 ‘감사히’ 내던진다. 병든 노동윤리는 이제 유한한 인간 존재를 환각시켜, 사람을 자본주의의 가미카제 전사로 탈바꿈 시킨다.
신자유주의가 탈구축한 한국은 피로사회다. 집단적 일중독 상태에 놓여있다. OECD 통계가 너무 많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는 공부하다 죽고 어른은 일하다 과로사 한다. 늙어서 폐지 줍다 병사한다. 그 과로할 일자리조차 없어 과로사 직행열차에 태워달라고 고용을 요구하는 형국이다. 이러니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도 부릴 수가 없다.
최근에야 한국에서도 게으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김정운 교수는 『노는 만큼 성공한다』에서 기존의 노동과 여가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비판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주장했다. 전쟁보다 자살과 과로로 더 많이 죽는 이 나라에서 위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직 한심한 전 정권의 여당 대표는 복지하면 국민이 게을러진다며 핀잔하지만 말이다.
3. 기계화 시대의 게으름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에세이 『보다』에 일본소설 한 구절을 인용했다. 너무 인상 깊었기에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이해가 안 되네. 로봇은 고장 나면 큰돈을 들여 고쳐야 하지만 나는 다쳐도 좀 쉬면 낫는데……. 게다가 건강보험도 들어있어 치료비도 거의 안 드는데, 웬만하면 값싼 나를 쓰지” 우스우면서도 꽤 슬픈 이야기다.
기계가 발전하면 기계가 줄여주는 만큼 인간은 쉬고 놀아야한다. 라파르그는 하루 최대 3시간 노동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인간이 쉬는 만큼 기계의 힘이 메워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더 발전된 기계로 더 사람을 굴린다. 기계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인간은 즉각 교체된다. 기술발전과 기계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기계를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즉 기계의 증대된 생산력을 노동해방의 구세주가 아닌, 착취율을 증가에 앞잡이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노는 것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게으름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기에 라파르그식 진보는 본성 회귀적이다.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맡고 인간은 노동고역에서 해방된 뒤 자유로이 노니는 세상. 게으를 권리는 이른바 노동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뜻한다. 인간 본성의 회복이다. 기계로 인해 인간은 게을러 질 수 있다. 우리는 게으름을 위해 기계를 사용할 수 있다. 게으름은 축복이다. 기계는 모든 인간을 유한계급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문제의식을 여기에 집중해야한다.
4. 게으름은 진보의 원동력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말미암은 계급투쟁이야 말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 말했다. 진보의 원동력을 투쟁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베블런의 지적처럼 사람들은 피곤해서 투쟁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마르크스는 가뜩이나 피곤해 버티기에 급급한 노동자에게 투쟁까지 요구한 무심한 사람일 수도 있다. 라파르그의 말처럼 “인간은 육체적 발전이 정점에 이르러야만 최상의 에너지와 도덕적 활력을 얻기”때문이다. 피로에 찌들어 노곤한 육신을 달래기에도 24시간이 모자란 사람이나, 하루하루 밥벌이의 지겨움에 종속된 자는 버틸 뿐 발전할 수 없다.
역사발전 5단계 이론에서 다음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물적 잉여가 축적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무언가를 많이 생산해서 진보하던 시절은 지났다. 관념 차원에서의 진보역시 함께 가야한다. 정신적 잉여는 게으름이다. 게으름을 축적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즐기고 놀아야한다. 자본이 뭐라고 하든 말이다! 우리의 놀이와 작당에서 창조가 비롯된다. 21세기 게으름은 단순한 재충전과 재생산을 넘어 창조의 밑거름이다.
부지런의 대명사인 개미집단에조차 게으름뱅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쉴 새 없이 일하는 개미 중 20-30%는 놀고먹는다. 자연의 섭리는 이들에게도 역할을 부여했다. 이들이 놀아야 집단이 장기 존속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미가 일해 피로가 쌓일 경우,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 반면 게으른 개미가 한 축을 차지하는 집단은 변화에 유연하다. 덕택에 오래 존속 할 수 있다. 이렇듯 게으름은 유연성을 낳는다. 자연의 법칙이다.
신자유주의는 비효율을 적출해낸다고 하지만, 마른수건 쥐어짜기의 명백한 퇴보다. 위기에 한방에 무너지는 비상사태다. 사람이 어찌 무한정 전시상태로 살 수 있을까? 위기에 짓눌려 눈에 보이지 않는 평형수의 중요성을 간과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모두에게 부지런을 강요하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무한동력을 요구하는 현 체제가 개미집단에게 배워야 할 차례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어서 게으름을 허하라.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