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


슬픈 일이 있어야 슬픔이 찾아오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찾아왔다는 것은 돌아갈 것이라는 기약과 한쌍이기 때문입니다.


제때 항복하지 못한 패잔병은 막다른 길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차라리 혁명을 열심히 할걸!" 공무원 시험에 수차례 낙방한 친구 녀석의 눈에는 공허함이 숱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잔에 투명한 술을 잔뜩 털어주었습니다.


초점을 잃은 사람의 눈은 오드아이가 아니었습니다. 통일된 흑갈색 눈이 빛에 많이 삭아 희미해졌습니다. 역시 빛과 희망은 강렬하고 또한 악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꿈을 꾸게 하니까요. 글쎄 그만 저는 그에게 서툰 동정을 들키고야 말았습니다. 미안함을 씻고자 샤워기가 뿜어내는 뜨거운 물을 거울에 힘껏 쏘았는데, 매끈해진 거울이 끈적하게 말하더군요.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2.

사람은 한번도 패배해보지 않고도 패배주의자가 될 수 있는 지적 생물체입니다. 포기도 도전도 하지 않는 방법은 역시 비겁하게 현실을 연장하는 방법입니다. 거기 눌러 앉아 상실한 의지를 껴안고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늘려놓고도 그 현실을 미워하며 부정하는 일입니다.


살다보면 노는 게 무섭고 지겨워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래서 늘 하던대로 도망쳐야지 마음을 굳게 먹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도망을 단념합니다. 숨차는 것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저앉아 세상에 굴복하는 과정은 항상 이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다시 기회가 주어진들, 안도하기 보다는 덜컥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게지요.


남들 보다는 잘하고야 말겠다는 치기의 투사들은 어느새 보통과 평범과 평균의 무게에 짓눌리고 맙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다시 준다 한들, 또 몇 번을 과거로 되돌아 간다고 한들 더는 해낼 자신이 없다는 의지의 쇠락에 빠지고 맙니다. 철저하게 무력하고 지독하게 권태로우며 노력보다 잔꾀를 다독이는 총체적 무정부상태 말이지요.


상투적인 표현은 정말 싫지만 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입니다. 더는 자신이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과정입니다. 살아보니 별 수 없구나. 그렇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고 신나는 일이 쪼그라든 채 사회에 녹아버리면, 비로소 청춘은 사회인으로 징집됩니다. 요새는 예비 사회인의 복무 대기줄도 꽤 길다고 합니다.





3.

삼수를 하던 시절의 고민은 세상에 나를 받아줄 학교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더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외로움, 세상에 내가 머물 곳이 줄어든다는 막막함 따위로 재현되었습니다. 지금은 존재증명에 실패할까 전전긍긍해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감히 미래를 예측하려 드는 습관과 결별해야한다고 합니다. 불확실성으로 머리가 가득차 버리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비우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농구공을 천 번쯤 땅에 튕긴다거나, 무의미한 낙서따위를 끼적이며 인지하지 못하는 반복을 계속하는 것이지요. 머리를 식힌다고도 하던데,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머리로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가슴이 받질 못하는 게지요. 공부하는 방법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소망이 떠나버린 자리에는 연민만이 남아버렸습니다. 역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가여워 하기로 했습니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시시한 인생이라 생각이 들 때 마다 있는 힘껏 자신을 가여워 하기로 했습니다. 사랑보다는 그게 쉽고 더욱 필요한 일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존재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상실에 익숙해지면서 말입니다. 나의 존재 증명 방식, 그것은 바로 글쓰기입니다. 펩시콜라를 기다리는 북극곰처럼,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서 어쩔줄 몰라하면서 말입니다. 탄산이 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연민의 시간>_2019.05.21 호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 올해의 서재에 당선되면 참 기분 좋은 일이 생기는군요^^
북플/알라딘 서재지기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9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목적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그 사랑에는 순서도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제 망설일 것도, 앞으로 달성할 것도 없다고.
그냥 만나서 함께 숨을 쉬자고. 그거면 됐다고.
또 한 번 기록한다.

2018.11.3 @PrismMak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재생목록의 모든 음악이 물려버리는 때가 있지. 여태껏 좋다고 믿었던 취미와 취향이 모두 달아나버리는 거야. 그치만 불가항력이야. 달아나는 것을 애써 붙잡지 않는 성격을 갖춰두는 것도 중요해. 누가 내주는 지도 모르는 숙제만 열심히 하다가, 노력하며 살았는데 난 왜 이 모양이죠 하고 의심이 들쯤이면 늦어. 선택을 꼭 자기만 한다고 생각하지마. 내키지 않게 주어지는 선택이 더 많아. 인생이 원래 그런 것 같아. 낙심하라는 말이 아니야. 청유형과 명령문과 평서문은 큰 차이가 있어. 열심히 살되, 안돼도 그만. 뭐 크게 기대할 게 없다는 거지. 대체로 듣기 좋은 의지의 발산보다 보기 싫은 무기력이 사는데, 아니 버티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야. 국어 시간에 이런 걸 역설이라 배웠는데, 아마 세상일이 마음만큼 안 풀릴 때마다 내 생각이 날 거야. 그건 시간이 가르칠 몫이니까. -2018.10.23 @PrismMak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른 엄지가 마비된 한 여인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고슴도치처럼 주사 바늘을 잔뜩 꽂았을 퉁퉁 부은 손가락이 가엽다. 고무를 당겨 이래저래 껴 맞출 공장에선 무수한 반복이 오갔으리라. 그 반복에 사람의 인대는 고무만큼 늘어날 탄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모시켰을 나름의 각오가 애달프다. 이제는 꿈이 짐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어려서 귀신들른 손이라 구박 받던 왼손으로 어설프게 밥을 저먹는 엄마의 서투른 젓가락질이 눈에 밟힌다. 웃는 연기를 잘해서 다행이다. 계절을 바꾸어 무엇이 남았나.

-2018.09.22 @PrismMaker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알벨루치 2018-09-23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즘메이커님 명절 잘 보내세요! 책준비는 잘 되어가세요? 늘 응원합니다^^

프리즘메이커 2018-09-24 01:07   좋아요 0 | URL
책은 엉금엉금 느릿느릿 쓰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즐거운 한가위 보내셔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