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 숨을 고른다. 노을에는 곧 넘어갈 듯한 해의 파스텔톤 숨결이 번져있다. 즐겨듣던 노래처럼 추억은 소중했고, 나는 후회없는 그림으로 남길 원했다. 가끔은 실패마저도 꽤나 근사한 이야기를 선물하곤 한다. 봄비와 겨울비와 가을 공기와 여름 노을을 좋아한다. 오늘 하루 잠시라도 하늘과 마주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해가 있어 다행이다. 


-2018.06.18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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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초기 증상을 앓고 있는 할머니가 처음으로 치매 학교에 갔다. 자원봉사자들이 목욕을 시키러 옷을 벗기는 데, 할머니가 너무도 완강하게 저항을 했다. 옷이 너무 불퉁거리고 무거워, 솔기와 마디들을 뜯어보니 현금이 가득했다. 반나절 옷을 다 터 찾은 돈이 무려 350만원 가량이었다. 자식들이 올 때마다 조금씩 쥐어주던 푼 돈을 소매소매 감춰놓고 바느질로 봉해뒀던 게다.



언제부터 기억을 잃고 돈을 모아두셨던 걸까? 목욕을 하는 할머니는 돈을 다 잃어버렸다며 목을 놓아 우셨다고 했다. 다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내가 또 줄거라고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한참을 달랬다고 했다. 전화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깊게 잠겼다. 나는 하던 영어원서 해석을 멈추고 학교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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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아들의 블로그를 염탐하는 우리 어머니.

늘 한박자 늦게 말이 통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누구보다도 소중한 나의 창조주께.

한 박자 늦게 읽어볼 글을 올립니다.

사랑합니다.  


-2018.05.08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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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08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 블로그를 가족에게 한 번도 알리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공개할 생각은 없어요.. ^^
 




잊지 않겠다 하여도 언젠간 잊고 말 것이다.
그러니 슬픔이 가시기 전에 목놓아 아파하고
기억이 다하기 전에 충분히 애도하고자 한다.
나와 같은 하늘을 살았던 

그들의 마지막 날숨을 기록하며
그날의 기억을 또 한 해 붙잡아본다. 

-20180416, 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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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정치외교학 석사과정 나호선)



한동안 나는 자유주의자로 살았다. 리버럴. 발음에서부터 폼이 났기 때문이다. 때마침 마이클 샌델 열풍이 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덩달아 그 분위기에 나도 달아올랐다. 자유주의의 결함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그에게 반했다. 그가 주장하는 공동체주의야말로 참된 시대정신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냅다 그 뒤로 숨었다. 그러다 어느 반골 청년처럼 마르크스에게 한방 세게 얻어맞고는 혁명에 관한 진지한 몽상에 잠겼다가, 이내 베른슈타인의 개량이라는 각성 음료를 한 움큼 들이마셔 꿈에서 깨어났다. 차례로 로크, 밀, 롤스, 하이에크, 아렌트, 그람시를 만났다. 학부 4년을 그렇게 보냈다.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확고해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반박을 해보고 옹호도 해보았지만, 결국 끝도 없이 내 정신은 유목민처럼 돌고 돌았다. 내 가치관을 어느 한 쪽으로 밀어 넣기엔 여러 거인의 철학은 드넓으면서도 빈틈없이 촘촘했다. 때로는 복잡하게 부정하고, 어쩔 땐 단순하게 설득당하는 인간의 변덕 탓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떤 매끈한 생각에 끼워 맞추기엔 태생적으로 울퉁불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세상에, 역사에 천재들이 너무 많은 것일 수도 있겠다. 나 같은 변방의 학생은 누구를 접하건 입 벌리고 감탄할 뿐 밖에. 타고난 반골인 줄 알았는데. 그냥 나, 천재에 맥없이 끌리고 잘 쓴 글을 좋아하는 거였구나.


또 다른 의구심도 있었다. 분명 이념은 세상을 설명하는 틀인데, 거꾸로 이 이데올로기라는 게 나를 자꾸만 외눈박이로 만드는 것 같다는 의심 말이다. 보조 바퀴를 다는 이유는 안정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이념이라는 보조 바퀴만 달면 세상이 시끄럽고 더 큰 소란이 생긴다.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이념이 일으킨 문제가 해결한 문제보다 많다는 것을 자꾸 확인하게 되었다. 미디어의 토론을 보면, 서로의 편견만 늘어놓고 으르렁거리는 논객들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나는 보조 바퀴 없이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전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즘(-ism)이니, 니즘(-nism)이니 논할 만큼의 자기 철학을 갖추지도 못했고, 또 그럴 능력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나는 대학 생활의 절반을 이념에 관한 책들을 읽어나가는 데 쏟아부었음에도, 나만의 철학을 발견하거나 완성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느 쪽인지를 정하는 것보다 항상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태도, 그 자체가 섹시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간단하다. 철학이 아니라, 배우는 자세를 고쳐먹자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건 간에, 스스로 무슨 주의자라 자칭하지 않기로 했다. 지레 단정 짓는 버릇부터 고치기로 했다. 몇몇 단서를 가지고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은 몇 가지 생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까다로운 존재니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지식을 대하는 것도, 사건을 다루는 것도 모두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어떤 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성실하게 정직한 사람이고 싶다. 천천히 두고 볼 줄 아는 여유 있는 마음,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흔쾌히 인정할 줄 아는 두둑한 배포가 필요할 것이다. 나 잘 할 수 있을까?


※ 본 글은 2018년 부대신문 1560호 [미리내에 띄우며] 섹션에 실린 필자의 기고문 입니다.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http://m.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7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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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4-0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청년이시다.....

프리즘메이커 2018-04-11 22:57   좋아요 0 | URL
춘래불사춘....ㅠㅜ입니다

stella.K 2018-04-09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청년이시다...2
사진핏은 거의 똑 같네요.ㅋㅋ

프리즘메이커 2018-04-11 22:56   좋아요 0 | URL
하핫ㅋㅋ 포즈 연구를 더 해보겠습니다 ㅎㅎ

북다이제스터 2018-04-13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넘 멋져요. ㅎㅎ^^
말씀하신 내용 중 이데올로기를 인생 보조바퀴로 비유하신 뜻을 잘 이해 못 했습니다.
인생 거의 주바퀴, 우리 인생 거의 모든 것 아닌가 생각되어서요. ^^

프리즘메이커 2018-04-13 21:35   좋아요 1 | URL
견해차이겠지요 ㅎㅎ 저는 이념과 자기철학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념을 보조바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북다이제스터 2018-04-13 22:41   좋아요 1 | URL
논란의 구별을 명확히 해주셨습니다. 말씀해 주신 걸로 제 생각을 되집어 보니 전 자기 철학이 이념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얘기인 것 같습니다. ^^

프리즘메이커 2018-04-13 23:13   좋아요 1 | URL
하하 항상 심도있는 질문을 던져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