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밍웨이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나면서 주요 대형 출판사들이 일제히 헤밍웨이 작품 번역에 들어간 것에 낭비라고 못마땅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자본력과 기획력으로 번역해줬으면 하는 국내 미소개 외국 문학 작품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특히 <노인과 바다>는 아무리 지금껏 정식 판권본이 없다고 해도 수십년 간 무수한 번역본이 쏟아져 나왔던 작품이기에 소식만 들어도 또 헤밍웨이야, 또 <노인과 바다>야라고 질리는 감도 없지 않다.

 

누구나 원전을 판권 확보 없이 마음껏 쓰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도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만, 자기 출판사만의 번역본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도 작업을 선택하곤 한다. 그 번역본의 결과물이 타 출판사보다 양질이라면 금상첨화. 그리고 이미 번역본이 많은 유명 작품을 또 번역한다는 것은 대박은 커녕 레드오션 중 레드오션이지만 작품 자체의 명성 때문에 어떤 번역본이든 어느 정도 판매는 보장되기 때문에 은근히 안정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이유로 올해부터 나오는 <노인과 바다> 번역본들은 기존의 번역본이 많음에도 원점에서 출발하는 것과 비슷한 경쟁을 한다. 단기적으론 얼마나 빨리 출판했고 마케팅을 잘했는지 등이 관건이다. 그리고 독자(소비자)들에게 더 어필하기 위해 외형적인 스펙에 신경 쓴다(특히 후발주자일수록 불리하므로 더).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땐 얼마나 본문의 번역이 오역 없이 잘 되어 있는지가 승자의 관건이 될 것이다.

 

2012년 <노인과 바다> 전쟁에서 두번째로 출전한 문학동네 선수. 출간일에서도 해설 양이나 번역자 인지도 및 전문성에서도 타 출판사본의 스펙을 이기지 못해 불리했다. 물론 섹시한 표지 때문에 고정 충성층을 확보하고 있긴 하지만, 고정 충성층은 가진 타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도 몇 있다. 외모 무기에 예약판매로 승부를 건 문학동네의 단기 마케팅 전략의 꽃은 영문 원서 증정이다. 예약판매자 전원과 초기 구매자 선착순에게 증정되는 이 원서(아쉽지만 2월7일 현재 전량소진)는 국역판과 같은 디자인과 문장(물론 영문)으로 컬렉션 가치를 더욱 높인다.

 

<노인과 바다> 작품 자체에 대한 서평은 따로 글을 썼기에 문학동네본의 주요 특징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쓴다.

노인과 바다 작품 리뷰>> [노인과 바다] 투쟁하는 모든 존재에게 보내는 불멸의 우화 

 

 

<노인과 바다>의 영어 원서는 그 동안 스크리브너사가 독점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출판사는 지난 반세기 간 여러 번 판형을 바꿔 쇄를 거듭했을 뿐 오탈자(누가 봐도 명백한)를 방치하였다. 문학동네는 번역의 원전을 스크리브너사 2003년판으로 삼았는데, 지금 증정하는 한정 원서는 스크리너사 2003년판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편집부에서 검토해 그 오탈자를 모두 고친 버전이다. 혹시 읽으면서 오타 또 찾아내면 문학동네에 신고하시길.

해설에서 차별점은 연표에 청새치로 찍은 사진 정도. 그 외엔 분량이나 내용이나 무난하다. 본문을 압도하는 장문의 해설, 논문 수준의 개인적 연구가 많이 반영된 해설 수록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은 선호할 듯.

 

슬슬 번역에 대한 말들이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헤밍웨이는 최대한 단문에 형용사·관형사 등 수식어구를 배제한 하드보일드 문체를 지향한다. 그래서 굉장히 깔끔하고 짧다. 문제는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언어와 문법 차이를 극복하면서 헤밍웨이의 문체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우리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원문에 없는 단어를 첨가하거나 임의로 문장을 나눠서 번역해야 헤밍웨이스러운 간결한 문장에 말이 되게 번역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을 선택할지는 절대적인 번역의 질보다 독자의 취향과 번역관에 더 달려 있다.

 

아무래도 보름 차이로 출간되었고 가장 최근 출간본이기 때문에 민음사와 문학동네의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민음사의 번역본과 비교해 문장의 길이가 좀 더 길고 부드러운 문체이며 번역투가 심하다는 평을 한다. 다르게 해석하면 전자가 헤밍웨이의 문체와 우리말스러움에 초점을 둔 번역이라면 후자는 원전주의를 택했다고 볼 수 있어 두 출판사 각 번역의 특성 차이일 뿐 무조건 단점으로 몰아 붙이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음본도 번역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문학동네본도 원전 문장을 임의로 쪼개거나 첨언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독성과 건조함은 포기하는 대신 원문대로 번역하려 한 느낌,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영어 문장이 절로 겹쳐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다 이번 주 서평책을 <노인과 바다>로 정하면서 번역본을 몇 개를 읽었는지 모르겠다. 소장한 <노인과 바다>만 여섯 권이니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살핀 것과 어릴 적 읽었던 것까지 합치면 휴. 그런데 문학동네본을 읽던 중에 한 단어에서 멈췄다. dolphin을 만새기로 번역했고 역자의 말에서도 이 부분을 이 번역본의 핵심으로 꼽은 것이다. 읽다가 멈칫한 이유는 dolphin을 돌고래가 아닌 만새기로 표현한 번역본을 처음 봤기 때문. 

 

만새기: 조기강 농어목 만새기과 / 감성돔: 조기강 농어목 도미과 / 돌고래: 포유강 고래목 돌고래과
국어사전과 학명으로 보면 명백히 다르게 구별되는 어종이 영어사전과 스페인어사전으로 들어가면 골치아파진다.

dolphin: 돌고래, 만새기
dorado 영어사전으론 만새기 스페인어사전으론 흑도미의 남성형
delfin 스페인어사전으로 돌고래,만새기
흑도미=감성돔의 북한어
감성돔 영어사전으론 black porgy 스페인어사전으론 dorado

너무 궁금해서 돌고래와 만새기 중 뭐가 맛없나로 검색해보기까지 한다.

원문 전체에 구체적인 설명 없이 노인이 다랑어 다음에 잡은 고기가 dolphin으로 표기하고 유일한 단서는 dorado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역자도 충분히 헷갈릴만한 부분이라 생각하였다. dorado의 주석도 이인규 역은 만새기의 스페인어 표현이라 달았으나 타 번역본은 돌고래의 스페인어 표현이라 달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내가 편집적 기억한 감이 없지 않았다. <노인과 바다>는 리얼리티 면에서 스페인어 단어와 묘사가 잘못된 부분이 꽤 있는 작품이라기에 디테일에 그렇게 집착해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고 넘겼던 것이다. dolphin에 대해 책 속에 묘사들이 몇 있고 porpoise란 단어가 나오기도 해서 그걸 감안하면 만새기쪽에 더 마음이 기운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미 학계에서 결론난 부분이었고 이에 대해 문학동네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글을 올렸다.

 

만새기에 대한 얘기 뿐 아니라, 이번 '책장' 포스트에 언급한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의 <노인과 바다> 번역본 검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이번 번역의 뒷얘기도 알 수 있다.

dolphin, 돌고래야 만새기야? 『노인과 바다』번역에 대하여 (::문학동네::)

dolphin, 돌고래야 만새기야? 『노인과 바다』번역에 대하여 2탄! (::문학동네::)

<노인과 바다> 역자 관련, 개인소장용 자료 풉니다. (::문학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양은 다시 뜬다] 태양이 지면 다시 뜰 뿐, 잃은것은 없다

 

 

 

두 가지 의의에서 탐독했던 책이다. 하나는 청년 헤밍웨이를 만나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에 사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8주 만에 초고 완성, 6개월의 집필 끝에 완성했다고 전해지는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뜬다>, 헤밍웨이가 인기작가로 발돋움한 출세작이자 그의 문학의 원형(신인 시절의 작품들을 뒤로 하고 이 소설부터 빙산 이론과 하드보일드 문체 등을 확립한다.)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1926년에 출간된 이 소설 때문에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개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후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헤밍웨이 또래 세대(1890년대 출생자; 특히 지식인과 예술가)를 정의하는 당연한 용어가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생각했던 1920년대 미국의 이미지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나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같은 모습이었다. 전쟁과 사회에 대한 환멸, 화려한 뉴욕, 지극히 일상적이고 잡기적인 탐닉들, 자유분방한 청년들과 잦은 파티들, 재즈의 유행 등 말이다. 당대 문화계의 거물이자 청년 헤밍웨이의 중요 멘토였던 스타인은 <태양은 다시 뜬다>의 제사(題詞)로 “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는 문장을 썼다(그녀가 창조한 말은 아니지만). '길 잃은', ‘잃어버린’, ‘망쳐버린’의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이 말은, 후에 이 세대를 분석하면서 내리고 정의한 복잡한 설명들보다 ‘언제나 젊은 애들은 답이 없는’ 만고불변의 관념처럼 단순 당시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은근히 비꼬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일 때문이었을까, 스타인과 헤밍웨이의 돈독했던 관계는 그다지 오래 갔다고 하진 않는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말년에 30년도 지난 일을 다시 꺼내 글을 쓴다.(미완성 유작 <이동축제일(1964)>/국내엔 올해 <파리는 날마다 축제>란 제목으로 이숲에서 초역). 헤밍웨이는 반박의 의미로 스타인의 제사 아래 구약성경 전도서의 한 대목을 덧붙인다. 그리고 거기서 책의 제목도 딴다. '태양은 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s)'고.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은 현대 미국 문학의 중심점이었다. 학창시절 디킨스, 스티븐슨, 키플링 등의 문학을 배우고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파리에서 플로베르, 스타인, 파운드, 조이스 등에 영향 받고 습작하며, (프랑스 문학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학을 흡수해 미국에 전한다. 그리고 미국 문학의 입지와 독자성을 높여 오늘날 현대 미국 문학을 공고히 다지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헤밍웨이 청년시기의 배경지식을 알고 나면 케네디가 왜 헤밍웨이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기록자이자 이들을 불후의 세대로 끌어올렸다고 표현했는지 십분 이해된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시작이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러한 명명을 반박하기 위해 쓴 작품인 <태양은 다시 뜬다>, 기대감에 책을 펼치고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역으로 기성세대를 공격하는 것도 없고, 젊은 세대들의 가치와 생명력을 피력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면 언젠가 태양은 다시 뜨겠지 하고 열심히 읽었으나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열려 있는 결말이다. 게다가 내용은 위에 언급했던 1920년대 미국 문학과 젊은이들의 모습들에 대해 흔히 떠올리는 전형이다. 파리로 친구들이 모여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놀고 떠들고 남녀 관계가 얽힌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철저히 대사 위주의 보여주기 기법으로.

 

 

<태양은 다시 뜬다>는 읽는 내내 헤밍웨이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참 많다. 주인공들의 일상과 여행 자체가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을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파리에 오만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주인공들의 여행 종착지는 헤밍웨이가 첫 아내와 세 번이나 여행 갔던 스페인의 팜플로나다. 주인공 제이크는 헤밍웨이처럼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매년 여름마다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의 친구인 빌과 콘은 작가다. <태양을 다시 뜬다>는 ‘아무리 분석해도 작품의 본질을 다 담지 못한다’는 호평을 받은 작품, 그만큼 젊은 작가들 특유의 패기와 혁신성이 엿보이는데다 온갖 은유에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품 중 하나이고, 글로 묘사된 브렛의 패션이 엄청난 유행이었으며, 이 소설 때문에 팜플로나의 투우가 유명해져 방문객 규모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출간 후일담들에 다소 고개가 갸우뚱했다. 다른 독자들은 다 쉽게 읽었던 건가?

 

 

물론 마음먹으면 충분히 단순하고 흥미 위주로 접근할 수 있다. 참전 중 부상으로 고자가 된 주인공 제이크는 자신의 상황에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도 애인 브렛과의 육체적 관계 문제로 고민이 많다. 안 그래도 브렛은 두 번의 결혼 경력에 약혼자가 있어 제이크가 늘 불안해하는데 나중엔 친구 콘이 자기 애인과 헤어지고 밀월여행을 다녀오질 않나 투우사 로메오와도 사랑에 빠지니 미칠 지경이다. 이렇듯 <태양은 다시 뜬다>는 제이크 시점의 1인칭 소설로 큰 사건 없이 여행과 사랑을 주제로 전개된다. 헤밍웨이가 추구한 문학이 완성되는 마지막 장편 <노인과 바다>와 시작이었던 이 첫 장편 <태양은 다시 뜬다>의 미묘한 특징 차이를 비교하거나, 욕도 하고 종이를 뚫고 나오는 주인공들의 젊음과 청춘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을 읽으며 얻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한편 이 책은 헤밍웨이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뿐 아니라 평소 역자 선호도에 대해 재고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문학 번역은 해당 언어와 문학을 전공한 교수 번역을 가장 선호하는 독자로서, 영문학자는커녕 전공자도 아닌 일반 전문번역가가 번역한 한겨레의 <태양은 다시 뜬다>를 선택한 이유는 이 작품을 번역하며 수많은 자료 조사를 하며 비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역자의 노력이 느껴진 번역본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스톤백 교수의 <태양은 다시 뜬다> 연구를 중심으로 지도와 사진 자료를 수록하며, ‘순례 모티브’와 그 외 배경지식(기본 해설, 연보)을 담은 45페이지 가량의 해설을 썼다. 또 210개의 각주를 원문 단어와 함께 본문과 함께 수록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 작품을 단순 당대 트렌디 소설로도, 사랑에 관한 모든 것으로도, 제임스와 주변 인물들의 일상과 심리를 통해 전후세대, 고국이탈자로 불렸던 1920년대 젊은이들이 불안·고민·실존주의적 탐구로도, 산티아고 순례처럼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즉 <태양은 다시 뜬다> 역시 건조하고 행간이 많아 다양한 감상이 가능한, 전형적인 헤밍웨이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 관심 있다면 서평이나 논문 읽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반드시 각자의 감상을 찾길 바란다. ‘다시 뜨는 태양’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다. 혹자는 제이크의 존재 자체나 낚시나 투우로 상징되는 소설 속 몇 에피소드들이 좌절치 않고 전진하는 희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으론 헤밍웨이는 어떤 거창한 반론이나 의미 부여보다는 그저 당시 청춘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자신 세대의 존재를 증거하고 영원으로 남기는 것이 스타인의 명명에 대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We were here, 우리가 여기 있었노라고.

 

 

더 보기>> http://der_insel.blog.me/1201519619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학의 미래 - 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월터 카우프만 지음, 이은정 옮김 / 동녘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의 미래] 죽은 인문학자의 살아있는 일침

 

 

 

 

http://der_insel.blog.me/120147407226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1977년 작, 생각보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책으로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 책 뿐 아니라 월터 카우프만의 저서는 대학 도서관들에 원서들은 제법 소장되어 있는 편이나 그 동안 번역된 게 손꼽을 정도다. <인문학의 미래>는 그의 30여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에 외치는 쓴 소리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각종 대학도서관을 비롯하여 이 책의 원서를 소장하는 곳이 거의 없으며 미리내에서 낸 번역서는 소장 도서관이 제법 많은데, 13년 전 이남재 교수가 번역한 이 번역서는 '수많은 오역과 낯 뜨거운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이라는 혹평을 들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죽은 인문학자의 명서를 제대로 된 번역으로 21세기에 살리고 알리겠다는 동녘과 이은정 교수의 의욕을 보고 새 번역본이 무척 궁금해졌다.

 

 

 

제목을 봤을 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현상 진단과 대안에 대한 담론을 다룰 것이란 일반적 기대와 달리 <인문학의 미래>는 인간형의 고찰과 고등교육에서의 교수법, 독서와 출판에 대한 것까지 다루며 논의의 범위가 상당히 넓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접근과 기술이 가능한 것은 저자가 철학자이자 교수, 번역가, 서평가, 편집자, 시인 등 다양한 이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 인문대학이 겪는 시련이 세계 제 2차 대전을 기점으로 대학교육이 재편되면서부터라고 분석하는데 전후, 수많은 대학이 생기고 교수가 부족해 60년대까지 박사 미 소지자도 쉽게 교수가 될 수 있던 것이 불과 십몇년 만에 미국만 매년 2000명 이상의 백수 인문학 박사를 내는 상황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68혁명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흥미로웠다.

 

 

첫 장 '네 가지 유형의 마음가짐'은 이 책의 논의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바탕이 되는 장으로 저자는 네 가지의 인간형을 제시한다. 기존의 이론과 시대의 상식을 뒤집는 새롭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통찰가형, 기존의 연구들과 자료들을 정리하고 계승하며 학파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사변가형, 어떤 사상과 이론도 틀릴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며 비판적 견지와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형, 시류를 중시하며 지금 당장 팔릴 것을 생산(연구·집필 등)에 집중하는 저널리스트형이다. 이 유형들이 어떤 건 무조건 좋고 어떤 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월터 카우프만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교육과 사회가 이러한 유형들이 균형 있게 공존하지 못하고 사변가형과 저널리스트형 인간들만 주로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2장과 3장은 책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특히 흥미를 가지며 주의 깊게 볼 부분이다. 전자는 독서방법론에 대해 후자는 서평·번역·편집에 대해 다루는 장이다. 2장에서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사회과학의 핵심을 독서로 꼽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잘 읽는 법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교수들과 학자들은 각자의 극단적인 독서법을 고집하는 현실에 개탄한다. 그러면서 고전 독서법을 중심으로 성서해석적 독서, 독단론적 독서, 불가지론적 독서, 변증법적 독서 네 유형의 독서법을 설명하며 변증법적 독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서평의 정치성과 번역과 편집에 있어 윤리와 주의할 점을 논하는 3장은 독자들을 각성시키는 '위험한 진실'인 동시에 이 작업에 얽혀 있는 인문학계에 대한 자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견이 양심을 이끌어낼지는 모르겠지만 새겨 볼 고언임엔 분명하다.

 

 

월터 카우프만이 정의하는 인문학의 범위는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여섯 분야이다. 4장과 5장은 교수법과 교육프로그램의 모색과 현재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방향잡기라면 마지막 장은 학제 간 연구로 마무리하며 인문학의 생존법에 대해 총정리하며 끝낸다. 고등교육에서 현저하게 소홀히 다뤄지는 종교 교육을 시작으로 철학과 문학 등 다양한 강의안들을 제시하는 4장을 읽으면서 프로그램 참고 뿐 아니라 양서 리스트를 얻어갈 수 있다. 5장과 6장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며 책 전체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미래에 대해 가장 충실히 다루는 장이다.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생존을 위해 강조한 것은 통찰가형이나 소크라테스형도 많이 나올 수 있기 위한 교육의 개혁과 학제 간 연구를 통한 인문학의 가치 강화이다.

 

 

역자는 이 책의 주요 독자를 인문학자(대학 교수와 그 외 연구자들)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책이 일반인 독자를 대상으로 했다기에 다소 수준이 높고 저자의 비판 방향이 학계와 교육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유리된 주제도 전혀 이해 못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아니기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이번 동녘에서 출간된 <인문학의 미래>는 번역에 신경 썼음을 강조하였는데, 길고 복잡한 구조의 문장이 많은 걸 감안할 때 가독성에 꽤 신경쓴 듯 보인다. 또 본문에 언급된 출판물이 단행본·잡지·장편인지 논문·단편·미술작품인지 기호를 달리 해 구분한다거나 문맥에 따라 'Bible'을 성서와 성경으로 바꿔가며 번역하는(그래서 헷갈릴 수 있지만) 섬세함이 있다. 또 카우프만이 정리한 참고문헌을 일일이 대조에 국내 번역 여부를 써놓은 것도 독자를 위한 상당히 세심한 배려다.

 

 

<인문학의 미래> 출간 이후에도 인문학은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인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월터 카우프만이 '자살'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이러한 위기에 인문학 스스로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나 싶다. 아이러니한 것은 출판계 같은 경우 '인문학 열풍'이 불고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강조하며 융합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순수인문학 교양서들은 점점 가볍고 쉬워진다. 인문학을 사랑하지만(그래서 취미로는 더없이 환영이지만) 전공은 꺼리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 것일까. 출간한지 30여년이 넘은 이 죽은 학자의 외침이 이젠 무의미하고 추억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침이 된다는 사실에 저자의 혜안에 탄복하면서도 몹시 씁쓸하고 아팠다.

 

 

몇 달 전 들었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어느 유명 인사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 시대엔 문과 가면 밥 굶는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60년대 초반 생이었고 그들의 대학시절을 우리 세대는 참 낭만적이다 여겼다. 지금은 더 상황이 좋지 않다. 수능이 끝났고 수많은 문과 학생들이 전공 선택을 고민하는 때이다. 그들에게 진로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으면 무난하게 경영학과를 가라 비겁한 조언을 던지는 기저는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자신의 아들을 인쇄소에 맡기는 P의 무력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표류하고 있는 인문학, 그럼에도 인문학을 계속 가르쳐야 하고 인문학은 발전해야 하며 인문학의 희망을 보고 싶다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인문학의 미래>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둑맞은 인생
제이시 두가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문학사상사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둑맞은 인생]

어떤 이유로도 누군가의 삶을 갈취할 수 없다!

<도둑맞은 인생>은 특이하게도 책 속에 따로 목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물론 여러 소제목으로 나뉘어져 18년간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일반적 서술과 심리적 독백이 교차되고 다양한 사진들과 일기들이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어,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제이시의 의식과 심리의 흐름을 따라가게끔 되어 있다. 여전히 심리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작가는 그런 사정을 밝히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어린이들이 호환마마전쟁보다 무서워했던 것은 불량불법비디오보다 아마 유괴였지 않았나싶다.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 중 2개인 이형호군 납치사건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같은 해에 일어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방송에서도 언제나 아이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심지어 말하지 않아도 아는 모 제과의 초코빵의 뒷면에도 실종된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으니 군것질 한번을 하면서도 이 친구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길 빌며 자신도 조심해야겠다고 또 다짐했던 시절이었다. 국적은 다르지만 제이시 두가드 역시 1991년에 11살, 1990년대 초반 어린이였고 지금은 30대 초반의 학부모세대가 된 이들의 친구이다.

 

 

[p.027]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후 나는 솔방울을 모으고 있다. (…) 심리치료사와 나는 결국 내 집착을 해결했다. 솔방울은 필립에게 납치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 손에 닿았던 것이다. 딱딱하고 끈적끈적한 솔방울은 18년 동안 강금당하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꽉 쥐었던 자유였다.

[p.055]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엄마를 꼭 껴안고 놔주지 않는 것, 두 번째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것이다.

[p.068] 처음 발견되었을 때 나는 어떤 책도 쓰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떠들썩한 사건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뒤늦게 알았다. 책 <도둑맞은 인생> 자체는 올해 7월에 출간(원서)되었으나 2009년 세상에 알려졌던 일이다. 11세의 여자아이를 유괴해 18년간 감금하며 두 아이까지 낳게 한 충격적인 사건, 자유를 찾고 가족과 다시 만난 후 계속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제이시 두가드는 대필 작가 없이 직접 자신의 18년 생활을 고백한 에세이를 펴냈다. 비슷한 시기에 8년간의 유괴감금 생활로부터 도망쳤고 역시 자신의 얘기를 책으로 펴낸 오스트리아 여인 나타샤 캄푸쉬가 있었다. 그녀는 책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선정적이고 비뚤어진 시선에 대해 분노하며 언급을 거부했다. 그에 비해 미국 여인 제이시 두가드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여주며 그런 반응들을 감내한다.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제이시의 유괴와 성노예 생활에 유괴범 필립의 아내인 낸시가 적극 가담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부부는 복지시설에서 일하다 만난 사람들로, 낸시는 계속 그 일을 한다. 밖에서는 평범하고 선한 이웃의 모습으로 살지만 실상은 마약중독자에 유괴범들, 남편의 변태적 성 취향과 성 학대를 방관하면서 어린 제이시두가드에게 연적으로서 여성으로서 묘한 질투감을 느낀다. 몇 해가 지나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게 되는 필립의 어머니 팻도 마찬가지다. 거짓 사연으로 소개되었고 나중에 치매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제이시를 '불편한 진실'로 느끼면서 침묵한다. 한편 필립은 성범죄 전과로 직장에서 잘리고 감옥에 있다가 보호감찰처분을 받아 주기적으로 보호관찰관이 집을 드나들었는데 마당에 있던 별채(제이시가 갇혀 있는)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점은 참 의아하다.

 

 

[p.058] 그는 내가 자기의 성 문제를 치료해주고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 '문제'로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대신 나를 데려왔으니 내가 자기를 도와주면 남들을 해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p.184] 그를 용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해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를 용서할 권리가 내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남은 일생 동안 이 문제와 씨름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우리가 한 가족이기를 바랐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저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이다.

[p.245] 팻은 내심 나를 싫어하고,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 같다. 우리가 그녀에게 얘기해준 적은 없지만,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게 바로 나라는 걸 아는 것이다.

 

 

필립은 자신의 성취향이 사회에 문제가 되는데 고치지를 못한다면서 제이시를 통해 제 2의 범죄를 막고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며 그녀의 삶을 앗아간 것을 정당화한다. 그는 일종의 복음주의자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며 가족들에게도 세뇌와 강요 수준으로 가르치는데, 자의적인 해석과 그릇된 신앙으로 자신의 범죄와 제이시 두가드와의 만남을 주의 뜻으로 정당화한다. 나중에 마약중독 수준과 왜곡되고 광적인 신앙이 더욱 심해져 환청을 듣는 필립은 자신의 인쇄사업과 그를 통해 구축했던 고객 망을 이용해 사이비 교단을 만들고 선전물을 배포한다. 제이시는 필립이 인쇄사업을 했고 자신이 보조를 했다고 밝히지만 처음부터 종교 활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일이 제이시 두가드가 자유를 찾게 되는 기회가 된다.

 

 

 

어떤 이유로도 누군가의 삶을 빼앗을 수는 없다. 이름도, 가족들의 축하와 훈육 속에 2차성징을 겪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는 즐거움도, 딸에게 엄마소리를 듣는 당연한 권리고, 또래들과 똑같이 학교를 다니고 자라며 평범하게 사는 것도 제이시는 모두 도둑맞았다. 너무 오랫동안 폐쇄된 공간과 인간관계 속에 필립에게 세뇌당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했고, 어린 나이에 강간과 출산 등으로 몸도 허약하고 키도 작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도 해체되고 딸과 언니를 잃은 슬픔에 고통스러워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이 무려 징역 431년(낸시는 징역 36년, 주정부의 배상금 2천만 달러 추가)의 어마어마한 형기를 선고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p.086] 첫해가 지난 후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시작했다. (…)  <스타트랙>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우주에는 여전히 범죄가 일어나고 있지만 지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구가 깨끗이 청소되었다는 것이 좋았다. 내게는 없는 것 같은 미래였기에 특히 좋았다.

[p.181] 고등학교 운동장을 걷다 보니, 잃어버린 내 인생이 새삼 서글퍼졌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질투와 시기심까지 느껴졌다. 나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렸어야 했다. 하지만 강제로 빼앗겼다.

 

 

우려했던 대로 제이시의 사건이 보도된 후 언론과 대중들의 관심은 끔찍했다. 처음 필립 부부의 체포 후 경찰에 보호된 제이시가 혼란스러운 틈에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은 제이시를 용의자를 변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 환자로 몰아붙였고 제이시 사건을 소재로 성인영화를 기획하려던 일도 있었다. 쇄도하는 각종 TV·잡지의 인터뷰 제의가 과연 제이시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고 그 배경엔 가족들의 전적인 지지와 도움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제이시가 왜 굳이 책을 쓰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가십으로 왜곡하기 쉬운 내용들을 여과 없이 담았는지 생각하였다. 그녀는 현재 유괴 등 깊은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을 위한 JAYC재단(Just Ask Yourself To care3)을 운영한다. 제이시의 바람처럼 그녀의 용기 있는 고백이 담긴 이 책이 사회고발하고 아픔 있는 사람을 어루만질 수 있길.

 

 

 

- 초판1쇄 교열상태 good

- <도둑맞은 인생>은 철저히 제이시 관점에서 보고 겪은 18년을 기술한 것으로, 종합적인 정황은 나와 있지 않다. 본 서평의 일부 내용은 책에 있지 않은 신문 기사 검색 등을 통해 삽입한 것임을 밝힌다. 

 

 

더 자세한 서평은 블로그로) http://der_insel.blog.me/1201470225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르는 여인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주는 위로, 그리고 공감

  

얼마 전 올 초 미국에 번역된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이 2011 아마존 문학·픽션 부문 올해의 책 베스트 10, 종합 베스트 100에 선정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신경숙, 80·90년대 주목할 여성작가였던 그녀는 <엄마를 부탁해>를 세계 31개국에 판권을 팔며 명실상부 요즘 대한민국 문학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그런 신경숙 작가가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세 장편 집필에 집중했던 지난 8년을 뒤로하고 6번째 단편집을 냈다. <모르는 여인들>, 8년간 작가가 가장 침울하거나 내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틈틈이 썼다는 이 일곱 편의 단편들은, 신경숙 특유의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문체에 위로받고 싶은 독자들에게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의 단편집을 기다렸을 독자들에게 반가운 연말선물이 될 것이다. 

지난 팔 년 동안 써놓은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 작가의 말 中

 

<모르는 여인들>은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중 하나이다. 제목이나 작가의 문체로 봤을 때 여성들의 이야기만 담겼을 것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웃들)’의 이야기에 가까운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남녀 모두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은 있지만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남’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동시대적인 공감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말처럼 일곱 개의 단편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쓰인 별개의 소설임에도 무언지 모를 정서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 신간 단편집 <모르는 여인들>엔 [세상 끝의 신발], [화분이 있는 마당], [그가 지금 풀숲에서], [어두워진 후에], [성문 앞 보리수], [숨어 있는 눈], [모르는 여인들] 일곱 단편과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해설, 작가의 말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 단편들(시간순 정렬/숫자는 책에 실린 순서임)

2. 화분이 있는 마당 -「문학수첩」2003년 가을(원제: 그 여자에 관하여)

3. 그가 지금 풀숲에서 -「창비」2004년 여름

4. 어두워진 후에 -「문학동네」2004년 가을

6. 숨어 있는 눈 -「문학과사회」2004년 가을

5. 성문 앞 가로수 -「세계의문학」2005년 여름

7. 모르는 여인들 -「문학동네」 2008년 여름

1. 세상 끝의 신발 - 「문학과사회」2009년 여름

[세상 끝의 신발]과 [화분이 있는 마당]은 일곱 단편 중 가장 연결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아버지와 낙천이 아저씨가 신발로 얽힌 인연을 소개하며 시작되는 [세상 끝의 신발]은 인터뷰어인 주인공 ‘나’가 낙천이 아저씨의 부고를 듣고 잠시 일을 접어둔 채 고향으로 내려가며 겪는 이야기다. 처음 순옥언니의 딸을 보게 된 ‘나’는 초상을 치르며 아버지와 낙천 아저씨, ‘나’와 처녀(순옥의 딸)에서 ‘나’와 순옥언니로 다시 ‘나’와 인터뷰이 발레리나로 생각의 화제를 돌리며 독자들에게 신발 이야기를 들려준다. [화분이 있는 마당]은 실연으로 식이와 언어에 장애가 생긴 인터뷰어 ‘나’가 후배 K의 부탁으로 대신 집을 돌봐주면서 어떤 여자의 도움으로 장애를 고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없는 존재더라 하는 이야기이다. 일종의 괴담인데도 공포보단 훈훈함으로 다가오는 묘한 매력의 단편이다.

 

[지금 그는 풀숲에서]와 [어두워진 후에]의 주인공은 남자다. [지금 그는 풀숲에서]는 자신의 교통사고를 통해 자기의 삶과 어머니를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와 외계인손증후군에 걸린 아내의 왼손에 시달리다 생각에 빠지는 이야기가 서로 얽힌 듯 평행선을 그리는 듯 이중적으로 움직인다. [어두워진 후에] 유영철과 김길태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극악무도한 ‘살인이 직업인 인간’과 그 때문에 가족을 잃은 ‘남자’의 방황과 치유를 그렸다. 특히 [어두워진 후에]는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 가장 이성 간의 관계를 통한 삶의 환기성이 강한 작품으로, 주인공 ‘남자’가 만나는 ‘여자’는 짧은 만남이지만 낯선 이에게 거리낌 없는 환대를 베풀며 자신을 여는 독특한 인물이다.

[숨어 있는 눈]은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가장 이질적이다. 동물(고양이)이 출연하는 유일한 단편이기도 하거니와, 실종된 A를 찾는 ‘당신’에게 독백하고 있는 화자 ‘나’의 이야기로 인물 간의 직접적인 대면이 없는 유일한 단편이다. [성문 앞 보리수]와 [모르는 여인들]은 아득한 시간이 지나 만난 이들이 서로의 삶을 각성하는 이야기다. [성문 앞 보리수]가 한때는 삼총사로 붙어 다녔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 사는 세 여자의 이야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밝혀지는 근황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아는 아주머니의 얘기로 시작하는 [모르는 여인들]은 남편을 간병하는 ‘나’가 옛 연인이었던 채의 편지를 받고 만나게 되고 그가 들려주는 그의 아내와 가정부 아주머니의 특별한 유대, ‘나’와 채 각자 혹은 서로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지면 그 사람 신발에 발을 몰래 넣어보고 싶다. - [세상 끝의 신발] 中(p.26)

그는 간신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생각했다. - [그가 지금 풀숲에서] 中(p.85)

이십대보다는 삼십대가 좋았고 삼십대보다는 사십대가 된 지금이 나쁘지 않다. - [모르는 여인들] 中(p.231)

지독한 세속적 일상 속에서 신화적인 체험을 길어 올리는 미학적 시선 - 정여울(문학평론가) 

앞서 언급한 정서적 유사성 외에 <모르는 여인들>에 수록된 일곱 단편들의 공통점은 현재 시점 혹은 중심 사건 외의 인물의 사연을 삽입한다는 것과 중후반부를 꿈결 같은 모호성으로 처리한다는 점이다. [세상 끝의 인물]의 소년병과 발레리나, [모르는 여인들]의 마라톤 아주머니, [숨어 있는 눈]의 몇몇 고양이들 등 어떤 면에 있어서는 거리를 던지며 이야기 속 세계가 확대되는 것이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이러한 편린처럼 지나갔던 존재들도 소설 속에 어우러져 의미를 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직간접적으로 꿈이나 의식, 환상 등을 통해 분위기를 전환시키거나 결말을 맺는 방식은 신비감마저 느낄 정도로 담담했던 일상들을 승화시키고 여운을 상승시키거나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행간의 구멍을 마련한다.

각각의 단편들을 서로 연결하며 마치 연작소설처럼 이 단편집을 즐기고 해석할지, 독립적으로 한 편 한 편에 집중하는 감상을 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 때론 상처받고 때론 위로와 도움을 받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다져나간다. 역으로 우연이든 의도였든 자신이 타인에게 준 영향들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일상’이란 이름으로 묶어 명명한다. 매우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는 다양한 타인들의 이야기, 전혀 자신과 관계없는 모르는 사람들이고 픽션인 걸 알면서도 이들의 일상을 훔쳐보고 생각에 잠기며 가슴 속에 따스한 물이 차오름을 느낀다. 3년 전 우리가 전혀 관계없는 남의 엄마 ‘너의 엄마’의 이야기에 울고 웃으며 위안을 받았다면 이번엔 여러 단편을 통해 확장된 다양한 타인들의 군상이 선물처럼 마음을 파고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