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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미래 - 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월터 카우프만 지음, 이은정 옮김 / 동녘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의 미래] 죽은 인문학자의 살아있는 일침
http://der_insel.blog.me/120147407226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1977년 작, 생각보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책으로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 책 뿐 아니라 월터 카우프만의 저서는 대학 도서관들에 원서들은 제법 소장되어 있는 편이나 그 동안 번역된 게 손꼽을 정도다. <인문학의 미래>는 그의 30여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에 외치는 쓴 소리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각종 대학도서관을 비롯하여 이 책의 원서를 소장하는 곳이 거의 없으며 미리내에서 낸 번역서는 소장 도서관이 제법 많은데, 13년 전 이남재 교수가 번역한 이 번역서는 '수많은 오역과 낯 뜨거운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이라는 혹평을 들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죽은 인문학자의 명서를 제대로 된 번역으로 21세기에 살리고 알리겠다는 동녘과 이은정 교수의 의욕을 보고 새 번역본이 무척 궁금해졌다.
제목을 봤을 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현상 진단과 대안에 대한 담론을 다룰 것이란 일반적 기대와 달리 <인문학의 미래>는 인간형의 고찰과 고등교육에서의 교수법, 독서와 출판에 대한 것까지 다루며 논의의 범위가 상당히 넓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접근과 기술이 가능한 것은 저자가 철학자이자 교수, 번역가, 서평가, 편집자, 시인 등 다양한 이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 인문대학이 겪는 시련이 세계 제 2차 대전을 기점으로 대학교육이 재편되면서부터라고 분석하는데 전후, 수많은 대학이 생기고 교수가 부족해 60년대까지 박사 미 소지자도 쉽게 교수가 될 수 있던 것이 불과 십몇년 만에 미국만 매년 2000명 이상의 백수 인문학 박사를 내는 상황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68혁명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흥미로웠다.
첫 장 '네 가지 유형의 마음가짐'은 이 책의 논의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바탕이 되는 장으로 저자는 네 가지의 인간형을 제시한다. 기존의 이론과 시대의 상식을 뒤집는 새롭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통찰가형, 기존의 연구들과 자료들을 정리하고 계승하며 학파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사변가형, 어떤 사상과 이론도 틀릴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며 비판적 견지와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형, 시류를 중시하며 지금 당장 팔릴 것을 생산(연구·집필 등)에 집중하는 저널리스트형이다. 이 유형들이 어떤 건 무조건 좋고 어떤 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월터 카우프만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교육과 사회가 이러한 유형들이 균형 있게 공존하지 못하고 사변가형과 저널리스트형 인간들만 주로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2장과 3장은 책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특히 흥미를 가지며 주의 깊게 볼 부분이다. 전자는 독서방법론에 대해 후자는 서평·번역·편집에 대해 다루는 장이다. 2장에서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사회과학의 핵심을 독서로 꼽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잘 읽는 법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교수들과 학자들은 각자의 극단적인 독서법을 고집하는 현실에 개탄한다. 그러면서 고전 독서법을 중심으로 성서해석적 독서, 독단론적 독서, 불가지론적 독서, 변증법적 독서 네 유형의 독서법을 설명하며 변증법적 독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서평의 정치성과 번역과 편집에 있어 윤리와 주의할 점을 논하는 3장은 독자들을 각성시키는 '위험한 진실'인 동시에 이 작업에 얽혀 있는 인문학계에 대한 자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견이 양심을 이끌어낼지는 모르겠지만 새겨 볼 고언임엔 분명하다.
월터 카우프만이 정의하는 인문학의 범위는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여섯 분야이다. 4장과 5장은 교수법과 교육프로그램의 모색과 현재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방향잡기라면 마지막 장은 학제 간 연구로 마무리하며 인문학의 생존법에 대해 총정리하며 끝낸다. 고등교육에서 현저하게 소홀히 다뤄지는 종교 교육을 시작으로 철학과 문학 등 다양한 강의안들을 제시하는 4장을 읽으면서 프로그램 참고 뿐 아니라 양서 리스트를 얻어갈 수 있다. 5장과 6장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며 책 전체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미래에 대해 가장 충실히 다루는 장이다.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생존을 위해 강조한 것은 통찰가형이나 소크라테스형도 많이 나올 수 있기 위한 교육의 개혁과 학제 간 연구를 통한 인문학의 가치 강화이다.
역자는 이 책의 주요 독자를 인문학자(대학 교수와 그 외 연구자들)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책이 일반인 독자를 대상으로 했다기에 다소 수준이 높고 저자의 비판 방향이 학계와 교육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유리된 주제도 전혀 이해 못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아니기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이번 동녘에서 출간된 <인문학의 미래>는 번역에 신경 썼음을 강조하였는데, 길고 복잡한 구조의 문장이 많은 걸 감안할 때 가독성에 꽤 신경쓴 듯 보인다. 또 본문에 언급된 출판물이 단행본·잡지·장편인지 논문·단편·미술작품인지 기호를 달리 해 구분한다거나 문맥에 따라 'Bible'을 성서와 성경으로 바꿔가며 번역하는(그래서 헷갈릴 수 있지만) 섬세함이 있다. 또 카우프만이 정리한 참고문헌을 일일이 대조에 국내 번역 여부를 써놓은 것도 독자를 위한 상당히 세심한 배려다.
<인문학의 미래> 출간 이후에도 인문학은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인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월터 카우프만이 '자살'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이러한 위기에 인문학 스스로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나 싶다. 아이러니한 것은 출판계 같은 경우 '인문학 열풍'이 불고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강조하며 융합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순수인문학 교양서들은 점점 가볍고 쉬워진다. 인문학을 사랑하지만(그래서 취미로는 더없이 환영이지만) 전공은 꺼리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 것일까. 출간한지 30여년이 넘은 이 죽은 학자의 외침이 이젠 무의미하고 추억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침이 된다는 사실에 저자의 혜안에 탄복하면서도 몹시 씁쓸하고 아팠다.
몇 달 전 들었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어느 유명 인사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 시대엔 문과 가면 밥 굶는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60년대 초반 생이었고 그들의 대학시절을 우리 세대는 참 낭만적이다 여겼다. 지금은 더 상황이 좋지 않다. 수능이 끝났고 수많은 문과 학생들이 전공 선택을 고민하는 때이다. 그들에게 진로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으면 무난하게 경영학과를 가라 비겁한 조언을 던지는 기저는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자신의 아들을 인쇄소에 맡기는 P의 무력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표류하고 있는 인문학, 그럼에도 인문학을 계속 가르쳐야 하고 인문학은 발전해야 하며 인문학의 희망을 보고 싶다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인문학의 미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