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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인생
제이시 두가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문학사상사 / 2011년 11월
평점 :
[도둑맞은 인생]
어떤 이유로도 누군가의 삶을 갈취할 수 없다!
<도둑맞은 인생>은 특이하게도 책 속에 따로 목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물론 여러 소제목으로 나뉘어져 18년간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일반적 서술과 심리적 독백이 교차되고 다양한 사진들과 일기들이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어,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제이시의 의식과 심리의 흐름을 따라가게끔 되어 있다. 여전히 심리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작가는 그런 사정을 밝히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어린이들이 호환마마전쟁보다 무서워했던 것은 불량불법비디오보다 아마 유괴였지 않았나싶다.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 중 2개인 이형호군 납치사건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같은 해에 일어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방송에서도 언제나 아이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심지어 말하지 않아도 아는 모 제과의 초코빵의 뒷면에도 실종된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으니 군것질 한번을 하면서도 이 친구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길 빌며 자신도 조심해야겠다고 또 다짐했던 시절이었다. 국적은 다르지만 제이시 두가드 역시 1991년에 11살, 1990년대 초반 어린이였고 지금은 30대 초반의 학부모세대가 된 이들의 친구이다.
[p.027]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후 나는 솔방울을 모으고 있다. (…) 심리치료사와 나는 결국 내 집착을 해결했다. 솔방울은 필립에게 납치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 손에 닿았던 것이다. 딱딱하고 끈적끈적한 솔방울은 18년 동안 강금당하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꽉 쥐었던 자유였다.
[p.055]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엄마를 꼭 껴안고 놔주지 않는 것, 두 번째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것이다.
[p.068] 처음 발견되었을 때 나는 어떤 책도 쓰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떠들썩한 사건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뒤늦게 알았다. 책 <도둑맞은 인생> 자체는 올해 7월에 출간(원서)되었으나 2009년 세상에 알려졌던 일이다. 11세의 여자아이를 유괴해 18년간 감금하며 두 아이까지 낳게 한 충격적인 사건, 자유를 찾고 가족과 다시 만난 후 계속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제이시 두가드는 대필 작가 없이 직접 자신의 18년 생활을 고백한 에세이를 펴냈다. 비슷한 시기에 8년간의 유괴감금 생활로부터 도망쳤고 역시 자신의 얘기를 책으로 펴낸 오스트리아 여인 나타샤 캄푸쉬가 있었다. 그녀는 책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선정적이고 비뚤어진 시선에 대해 분노하며 언급을 거부했다. 그에 비해 미국 여인 제이시 두가드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여주며 그런 반응들을 감내한다.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제이시의 유괴와 성노예 생활에 유괴범 필립의 아내인 낸시가 적극 가담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부부는 복지시설에서 일하다 만난 사람들로, 낸시는 계속 그 일을 한다. 밖에서는 평범하고 선한 이웃의 모습으로 살지만 실상은 마약중독자에 유괴범들, 남편의 변태적 성 취향과 성 학대를 방관하면서 어린 제이시두가드에게 연적으로서 여성으로서 묘한 질투감을 느낀다. 몇 해가 지나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게 되는 필립의 어머니 팻도 마찬가지다. 거짓 사연으로 소개되었고 나중에 치매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제이시를 '불편한 진실'로 느끼면서 침묵한다. 한편 필립은 성범죄 전과로 직장에서 잘리고 감옥에 있다가 보호감찰처분을 받아 주기적으로 보호관찰관이 집을 드나들었는데 마당에 있던 별채(제이시가 갇혀 있는)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점은 참 의아하다.
[p.058] 그는 내가 자기의 성 문제를 치료해주고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 '문제'로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대신 나를 데려왔으니 내가 자기를 도와주면 남들을 해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p.184] 그를 용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해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를 용서할 권리가 내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남은 일생 동안 이 문제와 씨름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우리가 한 가족이기를 바랐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저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이다.
[p.245] 팻은 내심 나를 싫어하고,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 같다. 우리가 그녀에게 얘기해준 적은 없지만,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게 바로 나라는 걸 아는 것이다.
필립은 자신의 성취향이 사회에 문제가 되는데 고치지를 못한다면서 제이시를 통해 제 2의 범죄를 막고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며 그녀의 삶을 앗아간 것을 정당화한다. 그는 일종의 복음주의자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며 가족들에게도 세뇌와 강요 수준으로 가르치는데, 자의적인 해석과 그릇된 신앙으로 자신의 범죄와 제이시 두가드와의 만남을 주의 뜻으로 정당화한다. 나중에 마약중독 수준과 왜곡되고 광적인 신앙이 더욱 심해져 환청을 듣는 필립은 자신의 인쇄사업과 그를 통해 구축했던 고객 망을 이용해 사이비 교단을 만들고 선전물을 배포한다. 제이시는 필립이 인쇄사업을 했고 자신이 보조를 했다고 밝히지만 처음부터 종교 활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일이 제이시 두가드가 자유를 찾게 되는 기회가 된다.
어떤 이유로도 누군가의 삶을 빼앗을 수는 없다. 이름도, 가족들의 축하와 훈육 속에 2차성징을 겪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는 즐거움도, 딸에게 엄마소리를 듣는 당연한 권리고, 또래들과 똑같이 학교를 다니고 자라며 평범하게 사는 것도 제이시는 모두 도둑맞았다. 너무 오랫동안 폐쇄된 공간과 인간관계 속에 필립에게 세뇌당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했고, 어린 나이에 강간과 출산 등으로 몸도 허약하고 키도 작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도 해체되고 딸과 언니를 잃은 슬픔에 고통스러워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이 무려 징역 431년(낸시는 징역 36년, 주정부의 배상금 2천만 달러 추가)의 어마어마한 형기를 선고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p.086] 첫해가 지난 후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시작했다. (…) <스타트랙>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우주에는 여전히 범죄가 일어나고 있지만 지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구가 깨끗이 청소되었다는 것이 좋았다. 내게는 없는 것 같은 미래였기에 특히 좋았다.
[p.181] 고등학교 운동장을 걷다 보니, 잃어버린 내 인생이 새삼 서글퍼졌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질투와 시기심까지 느껴졌다. 나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렸어야 했다. 하지만 강제로 빼앗겼다.
우려했던 대로 제이시의 사건이 보도된 후 언론과 대중들의 관심은 끔찍했다. 처음 필립 부부의 체포 후 경찰에 보호된 제이시가 혼란스러운 틈에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은 제이시를 용의자를 변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 환자로 몰아붙였고 제이시 사건을 소재로 성인영화를 기획하려던 일도 있었다. 쇄도하는 각종 TV·잡지의 인터뷰 제의가 과연 제이시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고 그 배경엔 가족들의 전적인 지지와 도움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제이시가 왜 굳이 책을 쓰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가십으로 왜곡하기 쉬운 내용들을 여과 없이 담았는지 생각하였다. 그녀는 현재 유괴 등 깊은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을 위한 JAYC재단(Just Ask Yourself To care)을 운영한다. 제이시의 바람처럼 그녀의 용기 있는 고백이 담긴 이 책이 사회고발하고 아픔 있는 사람을 어루만질 수 있길.
- 초판1쇄 교열상태 good
- <도둑맞은 인생>은 철저히 제이시 관점에서 보고 겪은 18년을 기술한 것으로, 종합적인 정황은 나와 있지 않다. 본 서평의 일부 내용은 책에 있지 않은 신문 기사 검색 등을 통해 삽입한 것임을 밝힌다.
더 자세한 서평은 블로그로) http://der_insel.blog.me/120147022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