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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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뜬다] 태양이 지면 다시 뜰 뿐, 잃은것은 없다

 

 

 

두 가지 의의에서 탐독했던 책이다. 하나는 청년 헤밍웨이를 만나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에 사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8주 만에 초고 완성, 6개월의 집필 끝에 완성했다고 전해지는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뜬다>, 헤밍웨이가 인기작가로 발돋움한 출세작이자 그의 문학의 원형(신인 시절의 작품들을 뒤로 하고 이 소설부터 빙산 이론과 하드보일드 문체 등을 확립한다.)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1926년에 출간된 이 소설 때문에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개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후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헤밍웨이 또래 세대(1890년대 출생자; 특히 지식인과 예술가)를 정의하는 당연한 용어가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생각했던 1920년대 미국의 이미지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나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같은 모습이었다. 전쟁과 사회에 대한 환멸, 화려한 뉴욕, 지극히 일상적이고 잡기적인 탐닉들, 자유분방한 청년들과 잦은 파티들, 재즈의 유행 등 말이다. 당대 문화계의 거물이자 청년 헤밍웨이의 중요 멘토였던 스타인은 <태양은 다시 뜬다>의 제사(題詞)로 “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는 문장을 썼다(그녀가 창조한 말은 아니지만). '길 잃은', ‘잃어버린’, ‘망쳐버린’의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이 말은, 후에 이 세대를 분석하면서 내리고 정의한 복잡한 설명들보다 ‘언제나 젊은 애들은 답이 없는’ 만고불변의 관념처럼 단순 당시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은근히 비꼬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일 때문이었을까, 스타인과 헤밍웨이의 돈독했던 관계는 그다지 오래 갔다고 하진 않는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말년에 30년도 지난 일을 다시 꺼내 글을 쓴다.(미완성 유작 <이동축제일(1964)>/국내엔 올해 <파리는 날마다 축제>란 제목으로 이숲에서 초역). 헤밍웨이는 반박의 의미로 스타인의 제사 아래 구약성경 전도서의 한 대목을 덧붙인다. 그리고 거기서 책의 제목도 딴다. '태양은 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s)'고.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은 현대 미국 문학의 중심점이었다. 학창시절 디킨스, 스티븐슨, 키플링 등의 문학을 배우고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파리에서 플로베르, 스타인, 파운드, 조이스 등에 영향 받고 습작하며, (프랑스 문학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학을 흡수해 미국에 전한다. 그리고 미국 문학의 입지와 독자성을 높여 오늘날 현대 미국 문학을 공고히 다지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헤밍웨이 청년시기의 배경지식을 알고 나면 케네디가 왜 헤밍웨이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기록자이자 이들을 불후의 세대로 끌어올렸다고 표현했는지 십분 이해된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시작이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러한 명명을 반박하기 위해 쓴 작품인 <태양은 다시 뜬다>, 기대감에 책을 펼치고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역으로 기성세대를 공격하는 것도 없고, 젊은 세대들의 가치와 생명력을 피력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면 언젠가 태양은 다시 뜨겠지 하고 열심히 읽었으나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열려 있는 결말이다. 게다가 내용은 위에 언급했던 1920년대 미국 문학과 젊은이들의 모습들에 대해 흔히 떠올리는 전형이다. 파리로 친구들이 모여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놀고 떠들고 남녀 관계가 얽힌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철저히 대사 위주의 보여주기 기법으로.

 

 

<태양은 다시 뜬다>는 읽는 내내 헤밍웨이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참 많다. 주인공들의 일상과 여행 자체가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을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파리에 오만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주인공들의 여행 종착지는 헤밍웨이가 첫 아내와 세 번이나 여행 갔던 스페인의 팜플로나다. 주인공 제이크는 헤밍웨이처럼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매년 여름마다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의 친구인 빌과 콘은 작가다. <태양을 다시 뜬다>는 ‘아무리 분석해도 작품의 본질을 다 담지 못한다’는 호평을 받은 작품, 그만큼 젊은 작가들 특유의 패기와 혁신성이 엿보이는데다 온갖 은유에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품 중 하나이고, 글로 묘사된 브렛의 패션이 엄청난 유행이었으며, 이 소설 때문에 팜플로나의 투우가 유명해져 방문객 규모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출간 후일담들에 다소 고개가 갸우뚱했다. 다른 독자들은 다 쉽게 읽었던 건가?

 

 

물론 마음먹으면 충분히 단순하고 흥미 위주로 접근할 수 있다. 참전 중 부상으로 고자가 된 주인공 제이크는 자신의 상황에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도 애인 브렛과의 육체적 관계 문제로 고민이 많다. 안 그래도 브렛은 두 번의 결혼 경력에 약혼자가 있어 제이크가 늘 불안해하는데 나중엔 친구 콘이 자기 애인과 헤어지고 밀월여행을 다녀오질 않나 투우사 로메오와도 사랑에 빠지니 미칠 지경이다. 이렇듯 <태양은 다시 뜬다>는 제이크 시점의 1인칭 소설로 큰 사건 없이 여행과 사랑을 주제로 전개된다. 헤밍웨이가 추구한 문학이 완성되는 마지막 장편 <노인과 바다>와 시작이었던 이 첫 장편 <태양은 다시 뜬다>의 미묘한 특징 차이를 비교하거나, 욕도 하고 종이를 뚫고 나오는 주인공들의 젊음과 청춘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을 읽으며 얻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한편 이 책은 헤밍웨이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뿐 아니라 평소 역자 선호도에 대해 재고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문학 번역은 해당 언어와 문학을 전공한 교수 번역을 가장 선호하는 독자로서, 영문학자는커녕 전공자도 아닌 일반 전문번역가가 번역한 한겨레의 <태양은 다시 뜬다>를 선택한 이유는 이 작품을 번역하며 수많은 자료 조사를 하며 비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역자의 노력이 느껴진 번역본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스톤백 교수의 <태양은 다시 뜬다> 연구를 중심으로 지도와 사진 자료를 수록하며, ‘순례 모티브’와 그 외 배경지식(기본 해설, 연보)을 담은 45페이지 가량의 해설을 썼다. 또 210개의 각주를 원문 단어와 함께 본문과 함께 수록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 작품을 단순 당대 트렌디 소설로도, 사랑에 관한 모든 것으로도, 제임스와 주변 인물들의 일상과 심리를 통해 전후세대, 고국이탈자로 불렸던 1920년대 젊은이들이 불안·고민·실존주의적 탐구로도, 산티아고 순례처럼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즉 <태양은 다시 뜬다> 역시 건조하고 행간이 많아 다양한 감상이 가능한, 전형적인 헤밍웨이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 관심 있다면 서평이나 논문 읽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반드시 각자의 감상을 찾길 바란다. ‘다시 뜨는 태양’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다. 혹자는 제이크의 존재 자체나 낚시나 투우로 상징되는 소설 속 몇 에피소드들이 좌절치 않고 전진하는 희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으론 헤밍웨이는 어떤 거창한 반론이나 의미 부여보다는 그저 당시 청춘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자신 세대의 존재를 증거하고 영원으로 남기는 것이 스타인의 명명에 대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We were here, 우리가 여기 있었노라고.

 

 

더 보기>> http://der_insel.blog.me/12015196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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