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품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당국은 아내에게 아무런 복수의 기회도 허용하지 않았다. 범행을 자백한 그 순간부터 위인은 아내의 보복을 피해 당국의 보호를 받게 된 격이었다. 그리고 아이의 참사와는 직접 상관이 없는 사람들끼리 범행의 목적과 과정을 추궁하고, 재판에서 그의 죽음을 결정지어 튼튼한 벽돌집 속으로 그를 들여보내버렸다.
아내는 결국 그것으로 원한 어린 복수의 표적을 잃어버리고 만 셈이었다.-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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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 - 에코의 즐거운 상상 4
움베르토 에코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9월
품절


언제나 책에 적합한 제목을 붙이는 데 발군의 실력을 갖춘 나의 출판업자 발렌티노 봄피아니(Valentino Bompiani)는...-12쪽

만약 문화를, 남보다 뒤떨어지지 않겠다는 심사에서 끈질기게 혼자 내적인 소양을 단련해 스스로를 고귀하게 만들고 대중의 세속성에 반대하고 나서는 "귀족주의자들이나 관심을 두는" 일로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열려진 문화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반(反)문화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대중의 삶이 복잡한 역사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되는 때에야 등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일시적이며 제한적인 일탈 현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대중문화는 논박의 여지가 없는 붕괴의 징후로 읽혀야 한다. 이러한 몰락에 직면해 "문화인"(몰락해갈 수밖에 없는 전사前史의 최후의 생존자)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최후의 증언을 해야 한다.-24쪽

훈련받은 대로 "평균적으로" 행동하던 대중들이 [...] 어느 날 갑자기 번데기의 껍질을 벗고 "초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문뜩 떠올리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26쪽

막강한 힘과 천부적인 재능이 넘쳐나는 이 주인공("초인")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엄청난 활동 능력을 보여주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종의 공식적인 상식의 지적국(地籍局)의 승인을 받지 않은 계획은 뭐든지 포기하고 절대 수동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려는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27쪽

"초인"에 관한 담론은 향수 어린 신화로 응결되며, 이러한 신화의 역사적 연관성은 흐릿해져 다시 수동성으로 이어진다. [...]
이 세상은 결코 "초인"을 위한 세계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저 우리들의 세계일 뿐이다. [...]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인간 중심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가려면 인간이 기성의 조건에 순응하지 말고 그러한 조건에서 벗어나야 한다. -28쪽

"외적인 요소"(보급가능성과 가격)가 제품의 성격 자체를 뒤바꾸어 놓게 된다. [...]
그것은 취향과 언어를 "평균적인" 수용 능력에 맞추어 놓았다. [...]
책이 대중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독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역으로 이러한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언제나 우아하게 대중의 이해 여부를 척도로 그리기 때문에 점점 평이해지고, ...-30-31쪽

제품의 복제 가능성과 고객의 증가 그리고 사회적 무대 장치의 확대가 이러한 출판물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조건의 망 전체를 새롭게 규정하고 이러한 출판물의 특징을 새롭게 만들어내며, [...]
이러한 책들은 대중들의 공식적인 도덕의 틀 속에서 널리 확산되어 나가면서 대중을 만족시켜주는 동시에 통제하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한다. 그리하여 기괴한 분위기를 쏟아냄으로써 탈주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화 교양층"을 발전시킴으로써 대중들이 문맹상태를 벗어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32쪽

문화산업이란 모든 문화 일꾼이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하려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여러 조건의 체계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슷해져가고 있으며 [...] 점점 자신을 의식해가는 종속 계급이 정치적 시민적 평등주의 프로그램과 긴밀하게 얽혀왔기 때문에...-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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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를 고귀하게 만들고 대중의 세속성에 반대하고 나서는 귀족주의자들이나 관심을 두는 일"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인간 중심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가려면 인간이 기성의 조건에 순응하지 말고 그러한 조건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기 두 문장이 좋군요. Thank, 부엉이님.


부엉이 2007-05-0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어판 서문에 불과한데, 밑줄 그을 게 많네요 ^^
 

                           

 

마르탱 파주, 비에 관한 짧은 에세이


La pluie est le mot de passe de ceux qui ont le gout pour une certaine suspension du monde.
Dire que l'on aime la pluie, c'est affirmer une difference.
(라쁠뤼에 르 모드 빠스 드 스끼옹 르 구 뿌륀느 쎅뗀 쒸스빵쑝 뒤 몽드.
디으끄 로넴 라 쁠뤼, 쎄따피르메 윈 디페랑스.)

비는, 세상이 잠시 정지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패스워드다.
말하자면,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차이를 긍정한다.  


언어의 의미가 무심결에 지나쳐지지 않고, 그 단어 하나하나마다 의미가 온전히 살아나는 느낌.
une certaine suspension, une difference
이 단어들에는 사전에 미처 다 넣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
모국어가 아니면서도 그 외국어의 뉘앙스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순간.
내겐 그저 바지를 젖게 하고, 손 하나를 빼앗겨버린 듯해서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비를,
저렇게 멋지게 통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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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03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책표지도 무척 산뜻하네요.

부엉이 2007-05-03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곧 번역이 나올 거랍니다~ 저도 기대되요^^
 
영원한 아이
필립 포레스트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림원 / 2007년 4월
품절


아이와 함께 우리는 치유 불가능한 것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피로에 전 우리는 뒤늦게야 일단 생명이 주어지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모든 탄생은 부드러운 재난처럼 느껴진다. [...]
경솔하게도 무(無)에서 끄집어내 실루엣의 역할을 하도록 강요한 것에 대해 아이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삶을 스쳐가는 산 자들은 그들이 벌이는 어둠의 연극을 위해 단역들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규칙이다. 내 딸아, 널 공포와 근심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데려다놓은 우릴 용서하렴.-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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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약속한 원고를 제때에 보내지 않는 느림보들에게서 글 빚을 뜯어내기 위해 프랑스와 유럽을 누비고 다녔다. 그 느림보들은 사회에서 하나의 독특한 종족을 구성하고 있었다. 자기네 관습을 지켜 나가는 데에 유난히 고집스럽고, 지체를 해명함에 있어 언제나 그럴싸한 핑계를 지어내는 지략이 뛰어난 집단이었다.
"수첩에 꼬박꼬박 적어 두어야겠어. 나중에 변명 편지들을 모아 서한집을 만들 수 있도록 말이야."
편집자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껏 받아 본 편지들만 보더라도, 그 글 빚꾸러미들에겐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았다.
우선 어머니, 아버지, 또는 자기를 키워 주신 삼촌이 돌아가셔서 그 가눌 길 없는 슬픔 때문에 도저히 집필할 수 없었노라고 주장하는 편지가 허다했다. 한번은 어떤 저자의 죽었다던 아내가 몇 달 후에 다시 살아난 적도 있었다.
병이 나서, 다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핑계도 흔했다. 아, 거북을 탄 늘보 작가들, 공교롭게도 글씨를 쓰려고만 하면 손이 떨리거나 경련이 일어 글을 쓸 수 없게 된다는 그 서경이라는 병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핑곗거리를 찾을는지?
무장 강도가 들었다고 변명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금시초문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강도들은 전문적인 수집가나 다름없다. 그들이 집을 터는 목적은 오로지 집필 중인 원고를 빼앗가 가는 데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아직 아무도 소장하지 않은 진품 중의 진품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들, 예컨대 보석, 텔레비전, 라디오, 현금, 수표 등을 가져가는 것은 단지 범행의 자취를 흐리려는 수법일 뿐이다... 장 루이라고 하는 사람의 핑계도 일품이었다. 그는 웃음기 하나 머금지 않은 태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웬 암소가(그래, 분명히 젖퉁이 달린 소라 했다) 한 부밖에 없는 원본을 가로채어 씹어 먹고 새김질까지 하더라고. 원, 세상에 염소라면 또 몰라도 암소가 종이를 그렇게 좋아하다니...

에릭 오르세나, '두 해 여름', pp.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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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27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이네요^^

부엉이 2007-04-2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날이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