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파는 남자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절판


고자질이란 실제 있었던 나쁜 짓을 흉내 내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그건 너무 천박한 행동이다. 고자질과 구타란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54쪽

감각의 인상에만 매몰되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진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78쪽

<졸업>이라는 영화를 함께 본 뒤 집으로 왔을 때 헤게는 피아노 앞에 앉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했다. 시간은 30분 이상 걸렸다. 헤게가 아다지오를 연주할 때 나는 순간적으로 헤게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에 빠졌다. 그러나 연주가 알레그로로 넘어가는 순간 내 넋을 잃게 만든 것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88쪽

추리소설에는 대개 한 페이지 정도로 집약할 수 있는 하나의 응축된 이야기 핵이 있다. 추리소설가의 재능이란 이러한 이야기 핵을 사실 정보 차원에서 교묘하게 은폐하고 유보시키는 기술에 있다. -98쪽

꿈이란 마치 펼쳐놓은 한 권의 책과 같았다. 당시 내 꿈에 등장하는 배경은 늘 두세 개 정도로 일정했고, 등장인물들 역시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나타나는 고정 배역이 있었다. 이 배역들은 단순히 내가 바깥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영이 아니었다. 반대로 뭔가 새로운 것을 표출해내고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경험들에서 나는 뭔가를 배웠고, 그것을 토대로 오늘의 성숙한 내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꿈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99쪽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글을 볼 때마다 나는 마치 무의식적인 글쓰기를 통해 내게 선사된 신비스러운 문서를 입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공상을 하고 가끔씩 뇌를 알코올에 푹 절여가면서까지 글쓰기를 하는 것은 아마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을 잊으려고 애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것을 잊으려고 그리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던 것일까?-103쪽

먼저 글을 쓴 뒤에 세상을 경험해도 된다는 믿음은 포스트모던적인 오해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작가의 삶을 살기 위해 작가가 되고자 한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작가가 되려면 먼저 세상을 살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도 그에 대한 결정은 삶 자체가 내린다. 글이 삶의 결실이지. 삶이 글의 결실은 아닌 것이다. -201쪽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유형이 아니지만 일단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을 만났다 싶으면 그녀를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알아내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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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5.8

 

2006.5.11 오전

 

2006.5.13 아침

 

아주 연한 보랏빛 하늘하늘한 꽃이 오래도록 피어있던 바이올렛이었는데,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었다.

새싹 옆에 누워있는 것이 분명 주검 같은데 푸른빛이 없어지지 않고 썩지도 않아서 버리지 못하고 놔두었는데, 얼마 전에 저 이름모를 녀석이 땅을 뚫고 나왔다. 으아~!

꽃피우는 바이올렛이었으면 좋겠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잘 크고 있다.  


 

 

"안녕, 화분!"

 

'Dr. 깽'에서 달고(양동근)가 화분에 물주며 하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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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라는 말은 거칠게 정의를 내려보자면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사회의 지배적 인식론으로 자리잡은 시기를 의미한다고 본다. 근대 이전과 비교해 볼 때 근대와 그 이후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진보'의 공간을 확장하며 달려왔고, '탈근대'를 향한 의식은 아마도 이 무한속도의 경쟁과 일방적 흐름에서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보는 반성의 한 몸짓이 아닐까 한다.

그중에서도 '나비와 전사'는 자괴적 반성이 아니라 나비처럼 가볍고 전사처럼 과감한, 생을 향한 긍정적이고 유쾌한 몸짓이다. 지나간 자리를 모조리 자신의 흔적으로 채우고마는 근대라는 탱크에 맞서, 짓밟히고 지워진 것들을 다시 일으키는 작업이다.

연암과 푸코를 두 개의 중심축으로 한바탕 통쾌한 썰을 풀어내는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솔직히 두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이러한 연구서를 접하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고, 또 예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성의 역사'와 '천개의 고원'의 잘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들에서 절망감을 톡톡히 맛본지라 이 책 역시 그러한 좌절감을 가중시키는 괜한 짓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그러나 '지은이의 말'을 읽는 순간부터 이러한 잡스런 기우들은 다 사라지고, 입담 좋은 길라잡이를 따라 문과 문 사이를 넘나들며 그야말로 '사-유(思-流)' 혹은 '사-유(思-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자유로운 서술방식을 일컬어 문체가 진지하지 못하다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나는 현학적 무게감을 덜어내기 위한 저자의 솔직담백하고 친절한 배려로 받아들이고 싶다.

연암과 푸코를 통해 동양과 서양으로 대표되는 여타의 이분법으로부터 어떤 접점을 찾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나 역시도 근대의 환상 속에서 내 안에 고착된 경계를 허물고 해묵은 편견들을 없애고 싶었다. 지금도 내안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과정들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 준 열쇳말들은 '자기속도 지니기'(1장), '삶의 전략으로서의 유머(해학)'(5장) 그리고 '거리 지우기'(6장)이다. 

'낙오자'라는 말은 모두가 한 속도로 움직이는 대오(隊伍)에서 뒤쳐진 사람을 말한다. 극소수가 주도하는 '빠른' 것만을 속도로 인정하는 이 사회에서 자신이 낙오자라는 열패감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책의 저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러한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 속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언제든 자신의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생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만족감을 맛보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고달픔을 양(陽)의 에너지로 바꾸어야 한다. 저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제로서 '유머'를 이야기한다. 유머는 바로 피폐해진 우리 내부에 어떤 공간, 즉 '여유'를 만들어준다. 그속에서 우리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을 축적할 수 있다.

이렇듯 저자는 내부의 공간은 넓히되, 외부와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타자와의 거리를 '편견'이라 칭하고 싶다. 우습게도 편견은 대상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다시 말하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세상과 나 사이에 수많은 벽을 만들고, 삶을 불편하게 하며 결국은 바늘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따라서 거리 지우기는 '존재-되기'의 경험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이 책의 목적과 내가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론의 전환이었다. 비판적 사고 없이 당연스레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근대의 환상을 걷어내는 것. 그렇지만 근대는 나쁘고, 탈근대는 좋다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은 "대칭적 동일성에 빠지기 때문에 언제든" 근대를 "복제할 위험에 처"(263쪽)할 수도 있다. 근대 없는 '탈근대'는 있을 수 없고, 근대를 배척하는 '탈근대'는 자칫 동어반복적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그토록 견딜 수 없어하는 '차이'를 재발견하고 그 '주름들' 속에 유폐되고 소외되었던 참삶을 되살리려는 목적을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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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5-1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요..

부엉이 2006-05-12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사해요^^ 저도 다른 분 추천할 때 버튼만 누르지 말고 꼭 이렇게 흔적을 남겨야겠습니다~
 

2006년 5월 4일 집주변 봄을 만끽.
 

<조팝나무>
영어이름은 Bridal Wreath,
직역하면 '신부의 화관', 즉 부케. 
꽃핀 모양이 좁쌀을 튀긴 것 같다하여 조팝나무.
어린순은 나물로, 뿌리는 해열·수렴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이것도 조팝나무.
무리지어 있는 걸 보면 봄에 눈이 온것 마냥
정말 예쁘다.

 

 <할미꽃>
오늘 처음 알았다, 할미꽃이 '아네모네 속(屬)'이라는 사실을.
학명은 Pulsatilla koreana.
라틴어 Pulso(치다, 소리내다)는 종모양의 꽃의 형태에서 유래.
아네모네는 '바람의 딸'이라는 뜻.

 

<금낭화>
부르는 이름이 지역마다 다르다.
강원도에선 며느리취,
영남지역에선 며느리주머니, 며늘취, 등모란, 금낭화
특히 횡성에선 며느리밥꽃, 
그리고 어르신들은 며늘취, 덩굴모란이라 부른다.

 


토양에 민감하여 산성에선 붉은색, 흰색 꽃이 핀다.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남획이 많이 된다"
이날 정말, 마실나온 동네 분이 끝내 분양해 가셨다.

 

 


<민들레>

민들레에 대한 안좋은 추억 하나.

지난해 이맘때 민들레가 다발로 있으면

예쁠 것 같아 대만 똑똑 따라 꽃병에 꽂아놨다.

잠깐 만에 집에 들어왔는데

처참하게 시들어있었다.

다시는 내 너를 따지 않으리라...

 

 


<딸기꽃>

정말 무섭게 번성한다.

그리고 딸기도 정말 많이 열린다.

여름 내내 딸기우유를 물릴 정도로 먹을 수 있다.

물론 모양새는 하우스 딸기에 비할 수 없지만,

갈아서 형채를 알 수 없게 만들면 그만이다.

 

 


<복숭아꽃>

벚꽃만큼이나 예쁘다.

저기서 열리는 복숭아의 반은 벌레들과 까치밥.

맛있는 과일에 벌레가 든다고 하는데 이상타.

정말 너무나 맛없어서 주로 조림을 해먹는다.

 

 


벚꽃보다는 듬성듬성 피지만

꽃모양새가 훨씬 단단하고 곱다.

 


지금은 헐벗었지만 한여름에는

가지가 휠정도로 복숭아가 열린다.

정말 휘어서 부러져버리기도 한다.

 

 


<은행나무>
은행나무에서 새잎에 돋고 있다.
정말 생명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꽃잔디>

집마당에 핀 꽃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봄분위기의 일등공신.

 

 

 

더 잘 자라라고 작년 한해 꽃을 피우고

죽은 줄기들을 잘라주었다.

집마당에 심어진 야생화들 대부분은

엄마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다.

어디서든 예쁜꽃을 보면 한삽 떠갖고 심으시는 엄마.

저것도 어디선가 얻어와 심은 것인데

저렇게 많이 퍼졌다.


 


꽃잔디 위에 뻗어있는 저 나무,

어쩐지 좀 외로워보여서.

 

 


<모종들>

농촌에서는 지금 이맘때가 가장 바쁘다.

올해는 좀 적게 심으시라 했는데...

 

 

 


마침 밭가는 날이라 곡괭이 들고 시늉만하고 내려왔다.

적당히 자라면 밭에 옮겨 심느라 또 애쓰시겠네.

땅에서 거둬 먹는 것들은 무엇하나

손 안가는 것이 없다.

 

 

아직은 저것들이 커서 뭐가 될지

난 분간하지 못한다.

콩 한가지만 알겠다.

 

 *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 뿐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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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언어는 이름하는 언어(Namensprache)다.
  사물은 목소리가 없기에, 인간이 대신 그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2006년 2월 21일 

  

*바벨탑 이전의 언어는 우리 것과 달라, 그 낱말만 들으면 사물의 본질이 저절로 떠올랐다.
  애초에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고 음성에 사물의 본질을 담았기 때문이다.

 

2006년 4월 29일, 너는 뫼르소.

 

* 바벨의 언어는 사물의 고유성을 지우고 그것을 획일적인 개념의 감옥에 넣어 분류한다.

 

 

2006년 4월 29일, 너는 카프카가 되어볼래?
           

 * 프레이저(James Frazer, 1854-1941)의 《황금가지》에 따르면 유년기의 인류는 추수를 할 때
   곡식이 낫에 베여 쓰러지며 지르는 비명을 들었다고 한다.

  

 2006년 4월 29일, "On est toujours un peu fautif."

* 그들은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사지를 뒤틀며 온몸으로 연기했다. 
   파도를 모방하는 게 아니라 아예 파도가 되었던 것이다. 존재론적 '닮기', 이게 바로 '미메시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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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06-05-0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념무상의 경지. 이름 붙인다는 것 자체가 허망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