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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라는 말은 거칠게 정의를 내려보자면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사회의 지배적 인식론으로 자리잡은 시기를 의미한다고 본다. 근대 이전과 비교해 볼 때 근대와 그 이후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진보'의 공간을 확장하며 달려왔고, '탈근대'를 향한 의식은 아마도 이 무한속도의 경쟁과 일방적 흐름에서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보는 반성의 한 몸짓이 아닐까 한다.
그중에서도 '나비와 전사'는 자괴적 반성이 아니라 나비처럼 가볍고 전사처럼 과감한, 생을 향한 긍정적이고 유쾌한 몸짓이다. 지나간 자리를 모조리 자신의 흔적으로 채우고마는 근대라는 탱크에 맞서, 짓밟히고 지워진 것들을 다시 일으키는 작업이다.
연암과 푸코를 두 개의 중심축으로 한바탕 통쾌한 썰을 풀어내는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솔직히 두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이러한 연구서를 접하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고, 또 예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성의 역사'와 '천개의 고원'의 잘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들에서 절망감을 톡톡히 맛본지라 이 책 역시 그러한 좌절감을 가중시키는 괜한 짓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그러나 '지은이의 말'을 읽는 순간부터 이러한 잡스런 기우들은 다 사라지고, 입담 좋은 길라잡이를 따라 문과 문 사이를 넘나들며 그야말로 '사-유(思-流)' 혹은 '사-유(思-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자유로운 서술방식을 일컬어 문체가 진지하지 못하다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나는 현학적 무게감을 덜어내기 위한 저자의 솔직담백하고 친절한 배려로 받아들이고 싶다.
연암과 푸코를 통해 동양과 서양으로 대표되는 여타의 이분법으로부터 어떤 접점을 찾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나 역시도 근대의 환상 속에서 내 안에 고착된 경계를 허물고 해묵은 편견들을 없애고 싶었다. 지금도 내안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과정들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 준 열쇳말들은 '자기속도 지니기'(1장), '삶의 전략으로서의 유머(해학)'(5장) 그리고 '거리 지우기'(6장)이다.
'낙오자'라는 말은 모두가 한 속도로 움직이는 대오(隊伍)에서 뒤쳐진 사람을 말한다. 극소수가 주도하는 '빠른' 것만을 속도로 인정하는 이 사회에서 자신이 낙오자라는 열패감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책의 저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러한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 속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언제든 자신의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생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만족감을 맛보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고달픔을 양(陽)의 에너지로 바꾸어야 한다. 저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제로서 '유머'를 이야기한다. 유머는 바로 피폐해진 우리 내부에 어떤 공간, 즉 '여유'를 만들어준다. 그속에서 우리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을 축적할 수 있다.
이렇듯 저자는 내부의 공간은 넓히되, 외부와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타자와의 거리를 '편견'이라 칭하고 싶다. 우습게도 편견은 대상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다시 말하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세상과 나 사이에 수많은 벽을 만들고, 삶을 불편하게 하며 결국은 바늘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따라서 거리 지우기는 '존재-되기'의 경험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이 책의 목적과 내가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론의 전환이었다. 비판적 사고 없이 당연스레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근대의 환상을 걷어내는 것. 그렇지만 근대는 나쁘고, 탈근대는 좋다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은 "대칭적 동일성에 빠지기 때문에 언제든" 근대를 "복제할 위험에 처"(263쪽)할 수도 있다. 근대 없는 '탈근대'는 있을 수 없고, 근대를 배척하는 '탈근대'는 자칫 동어반복적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그토록 견딜 수 없어하는 '차이'를 재발견하고 그 '주름들' 속에 유폐되고 소외되었던 참삶을 되살리려는 목적을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