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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평점 :
지난 여름, 태국을 여행할 때 신랑과 나눈 이야기가 있다. 신랑 퇴직후 따뜻한 나라 태국에서 한두 달쯤 머물다 가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다. 어느 나라든 어느 도시든 며칠을 머무는 여행이 아닌 한두 달쯤 살아보는 여행. 꼭 태국이 아니어도 좋다. 익숙한 장소를 떠나 제주도든,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머물다 오자는 말을 했다. 친구네 가족과 함께 하면 더욱 좋을 것 같아 함께 여행간 친구네 부부와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왕이면 함께 다니자고.
틀에 박힌 듯 생활하고 있는 우리. 익숙한 도시를 떠나는 여행이란 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이유도 되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삶을 향한 원동력이 되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나는 다른 데 덜 쓰고 여행하자는 주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좀더 즐겁고 행복하자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삶을 잘 사는 것이리라.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만약 자유로운 직업을 가졌으며, 꼭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해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들처럼 우리나라를 떠나 세계의 어느 곳에서 일이 년쯤 머물 수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도 없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삶은 곧 여행이며, 여행이라는 것도 며칠 머무는 게 아닌 일이 년쯤, 어쩌면 더 적은 한두 달쯤 머무는 여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자꾸만 낯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걸까.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아닐까. 어쩌면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일지 모른다. (9페이지)
이 여행산문집은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인 이우일이 역시 만화가이자 그림책 작가인 아내 선현경과 그림을 공부하는 딸 은서와 함께 미국 오리건주 북서부에 위치한 포틀랜드에서의 이 년 동안 살면서 그곳의 풍경을 전하는 책이다. 처음에 이 책을 받아들고 '퐅랜'을 '플랜'이라고 잘못 읽고는 어떠한 계획에 대해 말하는 책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여행산문집이라는 것에 다시 보았다. '퐅랜'은 '포틀랜드'의 영어식 발음을 그대로 가져온 제목이라는 걸 알고는 만화가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시계를 가지고 있다. 모양도 보는 법도 제각각이지만 시계를 가진 건 분명하다. 누구나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시계 관리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다. 그걸 보든, 버리든, 분해하든, 뭘 해도 상관은 없다. 고장이 나는 것도 자기 책임이고 잃어버려도 하는 수 없다. 중요한 건 누구나 하나씩 있긴 있다는 거다. (86페이지)
포틀랜드의 비오는 풍경을 상상했다. 일년에 6개월쯤 비가 내려도 퐅랜 사람들은 누구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그곳 말이다. 일 년의 대부분이 비가 내리는 이곳이 어쩌면 소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들이 머무는 곳이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소설에서는 포크스라는 걸 나중에야 발견했지만 말이다. 비가 와도 퐅랜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우산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여행자들. 저자 또한 처음엔 우산을 썼지만 나중에는 퐅랜 사람처럼 우산을 쓰지 않고 다녔다는 거.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느끼는 찰나였다.
아마 포틀랜드의 풍경을 그려보자면 수염을 기른 남자들과 거의 모든 퐅랜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타투,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들. 느리고 여유롭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느리다는 건, 순서를 지키고, 정확하게 일하는 것, 차례를 지키고, 법을 지키는 것이 가장 능률적이고 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말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작 일 년을 살았을 뿐인데 집으로 돌아온 기분을 느껴도 되는 걸까? 집을 떠나 드디어 집에 도착한 것만 같은 이 평온한 기분이라니. (190페이지)
만화가 답게, 포틀랜드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 삽화가 실려 있었다. 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퐅랜의 풍경들에서 저자처럼 한 번쯤 퐅랜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행이란 게 스치듯 다녀가는 곳이 아닌 최소 몇 달, 일이 년쯤 살아보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북적대는 곳이 아닌 소도시의 차분함과 정겨운 풍경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도 그곳을 좋아할 수 있겠다는 어떤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