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이야기가 좋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야기가 좋았다. 할머니에게 들려달라고 했던 옛날 이야기에서부터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을 읽는 일까지. 이야기가 좋아 지금까지 나는 이야기 책을 읽는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 읽었던 이야기 책들에서 아이들을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처럼 이야기는 오랜 시절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는 유달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즐긴다. 그냥 지나칠 내용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면 다시 한번 눈여겨보고 실화가 가진 파장을 기대한다.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 「설리 : 허드슨 강의 기적」 에서도 그렇다. 시간이 빠듯하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칠 영화였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해서 봤었고, 세월호 사건이 생각나 눈물을 흘렸던 영화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람은 소설을 읽을 때에도 자전적 소설이라고 쓰여있으면 한번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있음직한 이야기를 하는게 소설이지만,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기도 한다.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 라는 소설과 원작 영화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었던것처럼. 이처럼 있음직한 이야기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양산한다.

 

작가는 『길 위의 소녀』라는 소설에서도 노숙자에 대한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더니 이제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소설에서는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인지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냈는지 가늠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가에게 글이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끌어내 글로 표현하는 일이 작가의 글쓰기가 아닐까. 만약 어떠한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을때,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하지 않으면 때로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거나 트라우마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게 아니면 글이라는 매개로 어떻게든 풀어내야만 한다. 마음속의 울분을, 마음속의 상처들을 헤집어 드러내야 한다. 상처는 드러내야 치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이 수행해야 하는 소명이므로 행복한 일이었다. 문학이 인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 문학이 분노와 경멸과 질투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 그렇다, 그것은 좋은 소식이 아닌가. 뭔가가 일어났다. 우리는 문제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들이 나를 '본질'로 다시 데려가야 했다. (226페이지)

 

작가의 이야기인듯 허구의 이야기인듯 진행되는 소설에서 작가는 글쓰기라는 작업에 대해서, 글쓰기라는 고통에 대해서 근접해 설명한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더 넓고 깊은 참호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땅을 파는 일이라고 말이다. 또한 글쓰기는 작가를 외톨이로 만드는 일이라고. 외톨이라야만 글을 쓸 수 있기에 자기 고독 속에 빠져 있어야 글을 쓸수 있다는 것을 피력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작가에게 문제의 인물인 L은 극단적인 고독을 강조했고, 그 어느 누구도 작가의 곁에 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가의 친구들에게도 글을 쓰는 그녀를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메일을 남겼던 것. 오로지 L만이 그녀 곁에 머물렀고, 자신의 글을 쓰라고 종용했다.

 

 

작가에게 L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연인과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친구. 작가 델핀에게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얼굴을 비춰주지 않았다. 쌍둥이 아이들이 자신의 공부를 위해 떠났을 때도, 연인 프랑수아가 일 때문에 외국으로 출장을 갔을 때에도 그녀 곁에 머물렀다. 표면적으로 작가의 곁에 아무도 없을 때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자 친구였다. 그런 L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작가와 이름과 같은 소설가 델핀에게 L의 존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녀의 곁에서 그녀에게 글쓰기를 강조한 인물이다. 그녀에게 글쓰기를 강조했지만, 정작 델핀에게 3년 동안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주인공 델핀에게나 독자에게나 L의 존재는 궁금할 수 밖에 없다. L이 과연 실제 인물인가. 작가의 마음속 인물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진짜 있었던(그것과 비슷한) 일이라 해도, 제아무리 사실로 인증된다 해도, 우리 소설가들이 쓰는 건 언제나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우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실상 중요한 건 오히려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그리고 현실을 가공하는 그 모든 자잘한 사항들일 거예요. (371페이지)

 

흔히 친구들은 닮는다고 한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누군가가 예쁜 스카프라도 하게 되면 친구들이 한꺼번에 구입하기도 한다. 나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친구가 나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헤어 스타일을 한다면 이미지가 비슷해질 수 밖에 없다. 만약 누군가가 작가의 곁에서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게 조치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그녀가 일부러 작가와 닮아간다면? 한 줄의 글도 심지어 이메일도 보내지 못하는 작가에게 누군가가 대신 친구들과 가족들 혹은 출판업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등 작가의 모든 일을 맡아한다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린다. 점점 글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그 어떤 생활마저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데, 작가가 존재하는 이유마저 사라지게 만드는데 어떤 작가가 두렵지 않을까.

 

작가로서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과 소설이 가진 힘, 문학이 가진 힘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픽션과 사실의 경계에 서 있는 문학. 진실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은 작가의 이야기라는 점,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이야기의 산물이라는 점이었다. 작품은 작가의 내면의 거울이다. 작가는 내면에 깃들어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작품으로 나타낸다. 독자들은 작가의 내면의 거울과 마주하는 일에 이 즐겁게 동참한다. 이 책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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