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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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한 곳에서 꾸준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어떤 것에 의해 과거로 돌아간다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즐거울 것만 같았다. 우디 알렌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처럼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일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우리가 대부분 상상하는게 또한 로맨틱한 상상일 것이고. 하지만 과거의 세계로 돌아간 사람이 흑인이라면? 더군다나 19세기 흑인이 노예였던 미국의 남부로 돌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군다나 흑인을 검둥이로 불리던 시절로 말이다. 가지않기 위해서 발버둥 칠것이며 과거의 세계로 간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두려움일 것이다.

 

이 소설은 1976년대의 미국. 막 스물여섯 살이 된 다나와 케빈은 막 이사를 한 참이었다. 짐정리를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루퍼스의 부름을 받았다. 1815년 메릴랜드 주의 숲속이었다. 강에서 한 소년을 살려낸 다나는 자신에게 향한 총을 보고는 두려움에 떨었고 1976년의 자기집으로 오게 되었다. 현재의 그녀가 사라진 시간은 불과 몇초였으나 과거의 그곳에서는 몇십 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루퍼스가 위험에 처했을때마다 다나는 과거로 가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루퍼스의 강한 부름으로 말이다. 또한 루퍼스는 현재에서 사라지기 전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아이였던 루퍼스는 소년으로 청년으로 점점 자라게 된다. 하지만 다나는 갈때마다 자신이 겪어보지 못했던 노예의 삶을 살아야했다. 채찍질과 노예를 사고 파는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그곳에 적응해야만 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처럼 낭만적인 과거의 여행을 기대해서는 안되었다. 그곳은 흑인을 짐승처럼 대했던 시대였다. 자칫 잘못하면 주인에 의해서 어딘가로 팔릴수도 있는 시기였다. 영화  「노예 12년」을 생각하면 된다. 다나가 과거로 갈때마다 궁금했던 것은 자신의 조상이 궁금했던 탓이다. 자유민인 흑인 소녀 앨리스와 백인인 루퍼스였다. 루퍼스가 아무리 자신들의 조상이었대도 다나를 무슨 수로 불렀던 것일까. 책으로 보았을 시대에 던져진 기분은 어땠을까. 과거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다음 번에도 그곳에서 살아야 하기에 다나는 항상 물건을 챙겨두었다. 비누며 아스피린, 옷등을.

 

과거를 살아보지 않은 다나는 도서관의 책 속에서 어떻게든 적응을 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해질수도 있었고 다시는 현재의 삶에 돌아올 수 없었다. 사랑하는 케빈과의 시간보다 과거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소설속에서도 언급하지만, 케빈은 현재의 시간보다 그녀가 과거에 머무는 시간에 염려를 표했다. 그곳에서 어느새 청년으로 자라 농장주가 될 루퍼스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염려했던 것이다.

 

 

 

현재보다 과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했던 것. 그러고보면 다나는 루퍼스에 대해 항상 관대했다. 그가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시켜 채찍을 휘두르게 했을때도 다른 노예를 팔았을때도 이상하게 관대하게 대했다. 그의 목숨을 여러번 살려주다보니 그가 무사히 청년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어느 순간에 그와 암묵적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일까.

 

너무 고통스럽고 두려울때는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해야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일을 마치게 되는 순간은 루퍼스의 죽음이어야 했다. 루퍼스가 죽든 자신이 죽든 누군가가 죽어야 고통스러운 시간 여행이 멈출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과거의 시간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며 현재의 시간엔 없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갈수 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자신이 가고 싶은 시대, 자신이 가고 싶은 나라에 갔을수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루퍼스가 죽음에 직면해 있을때 그의 부름으로 인해 루퍼스가 속해있는 시간속으로 가게 되었다. 다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과거로의 여행이 자신이 소설을 쓰는데 커다란 자양분이 될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 소설을 SF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800년대의 미국, 흑인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기의 흑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아픔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흑인으로서 살아가는 일들이 고통스럽기만 할텐데도 누군가와 사랑해 가족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았다. 농장주는 자신의 인적 재산이 늘어나는 걸로 기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또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노예들이 도망가지 않게 가족을 묶어두는 것으로 생각했고, 자식들을 팔아버렸다는 사실이다. 빚을 갚기 위해 혹은 잘못에 대한 보복으로.

 

책을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아 있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과거의 시간을 잊지 못할 다나였기 때문이다. 무사히 돌아왔지만 다나는 그 시간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삶은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려웠을 시간도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일 것이므로.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자신만의 시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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