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먹먹한 시간이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그저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도 가슴먹먹한 삶에 대한 글이었다고 해야할까. 우리는 사람을 만난다. 십대의 풋풋한 시간에도, 이십대의 열정적인 시간에도.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육십대, 칠십대 등. 모든 시간에 걸쳐 사람을 만나고 울고 아프고 고통받으며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찌 이십대의 사랑이 모든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고 믿는 깨닫는 그 시간이 나의 모든 사랑일 것이다. 그 나이가 십대건, 칠십대건. 내가 사랑이라고 믿는 모든 순간이 우리가 사랑을 아는 시간이다. 

 

  아마도 내 나이 때문일까. 사십대의 시간에서 몇년 뒤면 오십대의 시간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일까. 결혼해서 이십 년을 살아온 시간때문일까.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났고, 그 방향이 서로를 향해 있는게 아닌 등을 바라보고 있을때 무너질 가슴은 어찌해야 할까. 작가의 신작 『당신』에서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일컫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상대의 외로 틀어진 시선, 그이의 등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나를 바라봐 달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평생을 삭이며 살아왔을 시간. 나를 잃어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나를 드러낼 수 있다니. 하지만 그마저도 없었다면 여자는 평생 그 남자의 본 마음을 몰랐으리라. 아니 모른척 했겠지. 모른척하며 살다가 끝내 외면하고 자신의 마음을 못알아봤겠지.

 

  소설은 희옥이 사후 경직이 시작된 주호백의 몸을 닦으며 시작한다. 잘 펴지지 않는 오그린 사지를 펴고 검버섯 비늘들로 얼룩진 몸을 닦아내고 있다. 숨이 나갔다고 사람이 이토록 뻣뻣했던가. 몸을 세세하게 닦고 집 마당앞 죽은 홍매를 파낸 자리에 그를 묻었다. 혼자서. 그에게 빨간 넥타이를 매어주고 회색 양복을 입혀 묻은후 홍매를 다시 심었다. 그리고 그가 희옥을 위해 만들어준 소나무로 만든 의자를 다시 놓았다.

 

 

  일흔여덟 살의 윤희옥. 평생 다른 사람을 보고 살았다. 스물 즈음에 만난 김가인이라는 사람을. 시국은 위태로웠고 임신한 몸으로 어디든 가야했다. 희옥이 갈데라고는 호백 밖에 없었다. 호백은 그녀를 받아주었고, 함께 오랜 시간을 살았다. 아픈 아이를 자신의 친딸처럼 키웠고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다. 때로는 자신의 시종같이 모든 수발을 들었다. 그런 그가 치매에 걸렸다. 자신이 살아왔던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호백이 자신을 잃어버릴땐 과거의 일로 호통을 치고 과거의 시간속에서 본마음을 이야기한다. 그이에게 말하고 싶었던 속마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제야 희옥은 과거에 그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체감한다.

 

 

  평생 호백에 대한 마음을 알면서도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가 치매를 앓아 정신을 잃기 시작하고 과거의 시간속에서 머물며 본마음을 이야기할때에야 비로소 그의 마음을 알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몇십 년을 함께 살았어도 마음을 두지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그에게 사랑을 느꼈다. 희옥이 알아왔던 그가 아니었다. 머리를 치듯 다가온 감정이었다. 그는 그때서야 그를 향해 마음을 기울였다. 오래전 김가인을 사랑했던 마음과는 달랐다. 새로 태어난 듯 했다. 

 

  세 살 아래인 호백은 희옥에게 누나라 불렀었다. 그를 땅에 묻고 그가 비밀의 정원이라 불렀던 다락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의 일기를 보았다. 자신을 향한 글이었다. 내밀한 마음을 내비친 글들. 꼭꼭 숨겨둔 그의 감정들을 보았다. 자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다잡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감추었던 것이다. 일기속에서 '당신'이라고 부르며 쓴 글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를 묻어놓고도 실종신고를 하러 간 까닭은 평생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딸 인혜와 그가 갔음직한 장소를 여행하며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었고 그가 느꼈을 고통을 온전히 느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달라, 다른 사람이야. 당신은 말하자면 집을 짓고 싶었던 것 같아. 어떤 바람에도 끄덕없는 굳센 당신의 집. (255페이지)

 

당신 가슴속을 좀 들여다보구려. 평생에 걸쳐, 거기, 당신 가슴속에 내가 집 하나를 지었소. 고대광실로다가. 죽은 다음에도 들어가 살 집. 당신 가슴속인데 당신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지어서 미안해요. 미웠던 적은 있었지만, 당신과 헤어지고 싶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소. 그런 점에서 나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참, 아무것도 후회하지 말아요. 후회하면 당신 가슴속에 지은 내 집이 무거워질 거요. 아이고, 그 집이 무거워지면 당신, 무슨 수로 걷고 춤출 수 있겠소. 당신은 춤출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 (267페이지)

 

  일흔의 노작가가 "나의 '당신'"에게 바치는 소설이라는 말 때문은 아닐 것이다. 노작가의 곁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 대한 사랑의 찬가라는 걸 알아서일까. 소설의 처음부터 끝날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의 감정들이었다. 희옥과 호백의 삶에서 우리 부모들의 모습을, 작가의 모습을, 우리들의 미래를 본 듯 해서다. 젊은 날의 호백, 죽은 김가인을 향해 부유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희옥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마치 참회하듯 그가 머문 시간을 함께 했던 길은 눈물겨웠다.

 

  우리 삶을 관통하는 노년의 쓸쓸함. 사랑에 대한 위로, 그로 인한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는 사랑.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모든 것들. 우리의 젊은 날이 영원할 줄 알았던 시간. 이제 그 시간은 과거로 흘러갔다. 시간을 달리 해 사랑했을 뿐인 과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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