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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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허풍을 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를 하는 건 괜찮은데, 완전히 각색을 하여 말하는 사람들, 그것도 과대하게 포장하여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한테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진실성이 없어서이다. 진실성이 없는 사람은 습관처럼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과대포장하여 이야기하며, 또 이야기 하는 걸 즐기는 사람일테다. 물론 글로 읽는 허풍은 괜찮다. 각색하여 글로 나타낸 것도 괜찮다.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저절로 미소를 짓고, 그 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허풍을 치나, 궁금하기도 한 까닭이다.

 

『쿨한 여자』의 최민석이 이번엔 『풍의 역사』로 한바탕 허풍을 치는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건넨다. 바람 풍에 이풍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허풍으로 불렸던 이, 이풍의 아들인 이구 또한 이구 라는 이름보다는 허구라는 이름으로, 이풍의 손자 이언은 역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허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삼대의 허풍 이야기다. 허풍에서 허구, 허언. 이들 모두가 하는 말들은 한마디로 구라라는 거다. 바람처럼 부풀리고, 입으로 나온 말들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 글을 쓰는 것 또한 거의 각색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것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근현대사를 망라해 근현대사의 운명속에 휘몰아쳤던 한 사내의 일대기, 즉 손자가 할아버지인 이풍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건네고 있는것이다. 한 편의 이야기는 세계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를 말하기도 했다.

 

 

바람따라 세상을 떠도는 풍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때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였다. 나이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키가 장신이었고, 나이를 알 수 없었던 이풍은 미소년을 탐내기로 유명한 서른살의 아줌마로부터 여섯살의 금순이까지 탐낼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긴 소년이었다. 풍이 한 눈에 반하게 한 소녀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수선이었다. 수선은 풍에게 밤이라 불렸고, 밤이란 이름은 풍의 인생에서 아주 많은 역할게 하게 된다. 밤톨처럼 귀엽고 얼굴이 동그랗다라는 이유로 애칭처럼 밤이라 불렀던 것이, 저 머나먼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밤(bomb, 폭격)으로 들렸고, 베트남에서는 밤(bam, 베트남어 썰다)으로 들려 그의 인생이 운명의 바다에 회오리치는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그의 그런 삶에는 일본의 앞잡이로, 베트남의 마약밀수업자로, 혹은 고문관으로 이풍의 인생에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는 앞잡이가 있었고, 그의 반평생을 함께 하며 이 풍의 삶을 들었다 놨다하는 오중사가 있었다.

 

 

 

삶에는 언제나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비로소 진실이 되는 게 있단다. (43페이지)

 

삶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사람의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서 잘 풀리기도 하고 내리막으로 치닫기도 하는것 같다. 그래서 어른들은 친구들을 잘 사귀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풍에게 오중사나 앞잡이가 없었다면 첫사랑 밤과 자신의 고향 중도에서 별일없이 살았을수도 있다. 하지만 오중사나 앞잡이가 있었기 때문에 풍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을 치룰때 일본군으로 참전했고, 나이 마흔이 넘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 불안하지만, 사실 그때가 가장 인간다운 거란다. (254페이지)

 

 

최민석의『풍의 역사』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때론 허풍쟁이인 이풍의 이야기에 웃고,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풍의 허풍에 웃을수 밖에 없었다. 이름도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게 지었는지, 다시한번 최민석의 위트있는 글에 즐거워했다.

 

 

토요일자 신문의 '책의 향기'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얼른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역시나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최민석 작가의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능력자』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때론 슬픔속에 침잠하는 글도 자주 읽는 편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즐거운 기분이 드는 이런 책들이 정말 좋다. 희대의 입담꾼 최민석이 건네는 이야기에 몇 시간 동안 아주 즐거웠다.

 

 

아, 갑자기 이름에 풍 들어간 어떤 아저씨에게 '바람풍 아저씨'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풍의 허풍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싶다.

 

P.S. 이 책의 표지는 그냥 보았을때는 은색의 풍風자인데, 책을 기울이거나 사진을 찍으면 이처럼 오묘한 무지개색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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