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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말미에 번역자는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앨리스 먼로의 『떠남』을 새롭게 번역하여 출간한 작품이다. 그 당시에 이 작품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라고.
사실 나도 꽤 많은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고,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앨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까지 나는 그 이름을 몰랐다. 작가의 작품을 접해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대부분 장편소설을 좋아하고, 단편소설을 더디 읽고 있는 탓일게다. 나 또한 작년 10월에 발표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앨리스 먼로라는 작가를 알았으니 말이다.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다가도 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하면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 처럼.
이처럼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것 때문에 작가의 단편집 『디어 라이프』를 읽고, 작가의 연륜에서 보이는 문장들, 깨우침에 대해 알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작품 『런어웨이』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볼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적혀진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여자였고,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소소한 모습들을 만날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모두 여덟 편의 단편 속에서 표제작 「런어웨이」에서 주인공 칼라의 이야기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향해 남편으로부터 도피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클라크, 클라크가 없는 삶을 살겠다는 그 이유 하나때문에 택한 칼라의 모험이다. 클라크가 없는 토론토를 향해 버스에 올라탄 이유가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도피하고 싶었던 그 특별했던 하루에 느낀 모든 것, 자신의 삶, 자신의 곁에 있었던 클라크와 자신의 곁에 없을 클라크의 모습을 생각한 칼라의 특별했던 하루였다. 또한 칼라에게 도움을 주는 실비아의 마음 속 깊은 속내는 잃어버린 새로운 감정들을 만날 수 있기도 했다. 칼라 또한 남편 클라크를 피해 달아나면서 자신의 모습과 클라크와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지부진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지만, 그 평범하게 아웅다웅하고 살고 있는 것이 큰 행복임을 아주 늦게야 깨닫곤 한다. 어떠한 새로운 일을 결행하고서야 자신의 주변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기도 하는 것이다.
여덟 편의 단편 중에서 세 편, 「우연」, 「머지않아」, 「열정」은 모두 줄리엣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작 소설이다. 연작 소설에서는 시기가 다른 주인공들의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우연」에서의 줄리엣은 정교사 자리를 제안받지 못해 기차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에릭에게 떠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어 「머지않아」에서는 웨일 베이에서 에릭과 함께 살고 있는 줄리엣이 딸 퍼넬러피를 데리고 어렸을때 살았던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의 이야기이다. 교사인 아버지가 채소 장사를 하려고 교사를 그만 둔 이야기를 담았다. 「열정」에서 줄리엣은 이제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이십대가 된 퍼넬러피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들을 담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설렘, 만남, 고향의 부모, 누군가의 떠남을 알수 있는 연작 단편 소설이었다.
우리의 삶을 보아도 누군가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나이가 들어 떠날 수 없는 이별, 그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고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게 아닐까 싶다. 지나 간 시간들의 후회와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모습들을 간접적으로 경험 할 수 있었다.
여덟 편의 작품 중에서 나를 사로잡은 작품은 「런어웨이」와 「반전」이었다.
「반전」에서 로빈은 매년 여름에 한 편씩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 기차를 타고 스트래트퍼드에 가 연극을 보고는 자신에 손에 들려 있었던 페이즐리 무늬의 천 가방이 없어졌음을 깨닫고, 다시 극장으로 가보지만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기차표도 돈도 없는 로빈은 주노라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남자를 우연히 만난다. 그의 가게에 가서 간단한 음식을 대접받고 그가 구입해 준 기차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남자는 대니얼, 혹은 다닐로 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로 돈을 돌려주고 싶어하는 로빈에게 내년 6월 자신의 가게로 찾아올 것을 부탁한다. 아보카도 색으로 주름이 퍼지는 녹색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오라는 것이었다.
우리 편지는 주고받지 말기로 해요. 편지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니까. 그저 서로를 머릿속에 담아만 뒀다가 내년 여름에 만나요. 나한테 미리 알릴 것도 없어요. 그냥 오기만 하면 돼요. 지금 이 마음 변치 않는다면 그냥 오기만 하면 돼요. (377페이지,「반전」중에서)
일 년의 시간을 기다린 후에 그녀는 다시 연극표를 예매하고 그를 만나러 스트래트퍼드에 갔지만 그가 무정하게 내쫓는 바람에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감정은 바래기 마련이다. 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늘 마음속에 남아있었을 다닐로, 혹은 대니얼에 대한 마음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우리 또한 그렇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을때 그 사람이 부재할 경우 혹은 내침을 당할 경우 마음을 다치고 돌아온다. 평생 오해를 안고 돌아오지만 시간이 지난후 진실을 알았을 경우엔 주인공의 마음을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도 아플수 밖에 없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을 읽으며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장편과는 다른 단편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새삼 느꼈달까. 단편도 이렇게 재미있고,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 둘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유려한 문장속에서 느낄수 있는 여러 감정들을 다시 느낄수 있었던 귀한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