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 추정경 장편소설
추정경 지음 / 놀(다산북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울에 폭우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한강대교의 교각 틈속에 자리잡은 벙커에 사는 이들이 있는데. 그곳이 넘칠까봐,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이 있을 곳이 없어질까봐 왠지 걱정이 되는 참이다.

 

우리는 마음에 상처입었을때 자기만의 공간으로 숨어든다. 어린아이들이 좁디좁은 공간으로 숨어드는 경우처럼. 그 조그만 공간으로 상처를 꼭꼭 숨기고, 그 상처를 생각하지 않으려한다. 한번씩 그 상처가 삐져 나올때마다 더 큰 상처를 받기 때문에.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다.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시간이 오래 갈수록 속에서 곪기 때문에 더 큰 상처로, 오래도록 남는것 같다. 때로는 슬프면슬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다리를 기둥삼아 거처를 마련해 살고 있는 '자연인'을 보았었다.

좁은 공간이지만 채광창을 만들었고, 누울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거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도 살아갈수 있구나 싶었다. 그에게는 다른 거처도 있었지만, 좁은 공간이 필요할때 그곳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책속에서 묘사된 벙커는 약간 그런 모습을 닮았다. 다만 한강의 물속으로 들어가 해치를 연다는 점이 달랐다고 할까.

 

열여섯 살의 소년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가족과의 관계와 친구와의 관계인것 같다.

가정이 행복할때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은거지만, 만약 아버지가 아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어머니가 아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아이들은 가정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어져 버린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곳에서 일어나는 폭력때문에 아이들은 '자기만의 방', 즉 '벙커'를 만들어 상처를 감춰두고자 한다. 그리고 한 아이의 손내밈 때문에 벙커속으로 숨어들었던 한 소년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아이들을 때리고, 아이들의 물건을 빼앗고, 학원비를 결재하는 카드까지 갈취하는 아이, 학급의 폭군인 김하균에게 여섯 명의 아이들이 집단 폭행하는 사건이 생긴다. 하균은 정신을 잃어 병원으로 실려가고,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폭행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동영상이 아이들 사이로 돌아다니고 가해자가 되어버린 학급의 반장은 우연히 문자 한통을 받는다. '저녁 7시 55분 한강 노들섬으로 와'라는 문자를. 학급 누군가의 장난으로 여기지만 힘든 마음에 한강으로 왔다. 그곳을 배회하던중 한 남자 아이가 등에 색을 메고 바닷속으로 빠졌다. 자살한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반장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그들만의 공간, 벙커가 있었다. 신비스러운 일곱살의 아이 미노와 아까 자살했다고 생각한 소년 메시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메시와 미노는 의식불명인 환자들의 신발을 세탁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신발을 깨끗하게 빨아 가져다 주었을때, 더 살아도 될 것인지, 이대로 저 세상으로 갈 것인지 스스로 선택을 하도록 하게 하는 신발세탁작업이었다. 반장인 '나'는 그들을 도와 신발세탁하는 일을 도우며, 어느새 벙커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하균의 가방속에서 일기장을 꺼내 읽으며, 생각없이 나쁜애인줄 알았던 하균에게도 말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희망의 자리에서 몇 배나 무거운 절망이 대신 채워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희망을 놓아버린 사람의 운동화는 이렇게 무거운거야. 우린 그 절망의 무게를 덜어주는 일을 하는 거고.  (64페이지) 

한 달 동안만 있기로 한 벙커에서의 생활.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선 발전기 페달을 밟아야 하고, 일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밥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발견한다. 나 자신 뿐만이 아닌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각자의 사연과 아픔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수호천사처럼 미노의 곁에서 미노를 돌보는 메시의 정체도 그렇고, 미노의 정체도 궁금하다. 한강변에서 낚시를 하던 할아버지, 친구에게 사기를 치고 술을 마시며 주정을 부리는 아저씨, 부탄가스통을 줍는 할머니, 그들 모두는 모두 각자 자신들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이 싫어 내 존재를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다른 나로 변하여, 벙커로까지 향하게 했던 것 같다.

 

아픔이 있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 벙커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들이 생활했던 벙커도 상처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해주는 곳이었다.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그들만의 공간인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본다. 그것이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만약 우리가 나이를 먹었을때, 우리가 경멸해마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볼수 있다면, 우리는 삶을 달리 살지도 모른다. 자신이 싫어하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픈 영혼을 가진 이들에게 '나만의 작은 방'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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