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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고작 계절 (<여름은 고작 계절> 윈터에디션)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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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을 떠올렸다. 중학교 1학년, 시골에서 전학을 간 나는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쭈뼛거렸던 시간이 몇 달은 갔다. 화장실 갈 때, 점심 먹을 때 혼자서 다니면 외롭다 못해 괴롭다. 나중에야 친구들이 생겨 어울려 다닐 수 있었다. 예민한 시기의 친구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걸 일깨운 소설이었다. 더군다나 인종이 다르면 우리가 상상해왔던 것보다 그 이상이라는 걸 이렇게 소설에서 배운다.
IMF 여파로 이민을 결정했던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다. 낯선 나라에서 친구도 없고 영어가 서툰 제니는 있는 듯 없는 존재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아시아인이라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놀리는 아이들 틈에서 어떻게든 무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제니가 보인다. 이를 악물고 영어를 공부하여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한나가 학교로 왔다. 아이들이 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는 한나를 보면서도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애써 감췄다. 한나는 아이들이 ‘해나’라고 부르자 자기 이름은 ‘해나가 아닌 한나’라고 말했다. 한나는 제니와는 다른, 의사 아빠, 학예사인 엄마를 두었다. 직장을 떠도는 아빠, 청소 일을 하는 엄마와 함께 남의 집 지하에 사는 제니와 다르게 한나는 경제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학교 아이들 틈에서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저 말이 통하지 않은 한나를 무시하고, 배척할 뿐이다.

제니와 한나가 생활하는 학교는 여러 인종이 모여 있다. 아시아인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학교에서 친구들 무리에 끼고 싶어 애를 쓰는 모습이 안타깝다. 같은 아시아인을 무시하고 백인 아이들 틈에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그 마음은 누구라도 공감할 부분이었다. 자기를 놀리는 말을 하는데도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한나를 바라보는 제니는 웃지 말라고, 한 대를 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나의 모습에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화자 제니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이 글을 ‘회고록이자 반성문’이라 일컫는다. 15년 전, 호숫가에서 쓰러진 한나를 죽도록 패며 소설이 시작된다. 각양각색으로 변화하는 지난 삶 중에서 오직 하나의 사건만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제니가 한나를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안내한다.
제니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한나는 제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통역해주길 바라고 어려운 과제를 도와주길 바란다. 이를 악물고 영어 공부를 했던 제니는 한나가 영어 실력이 더딘 게 못마땅하다.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언어가 통하는 게 기본이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노력을 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한나의 말은 제니에게는 핑계처럼 들릴 뿐이다. 한나를 바라보는 제니의 눈길은 안타까움 혹은 한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한나를 멀리하면서도 애틋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후회의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한 마음이다.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발악하듯 무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마음과 친구를 지켜보는 애틋함이 공존할 것이다. 결말이야 다르겠지만, 속수무책으로 다가온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악몽처럼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찬란했던 지난 여름을 되새기는 것은 위무의 시간이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친구를 떠올리는 일을 추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통은 회한이 되어 제니를 감싼다.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을 함부로 선망하고 가진 것을 폄하하는데 일생의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천국은 언제나 밖에 있고, 집은 지옥이다. (9페이지)
여름은 고작 계절인데 한나는 그 안에서 많은 감상을 얻는 것 같았다. 나는 한나의 마지막 여름을 손에 쥐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중략)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이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라고 상상했다. 한나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의 날씨를 떠올렸다. 그러자 모든 게 여름의 조각들로 보였다. (314페이지)
한 사람의 지난 시간이 아프게 다가온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 속으로 빨려가듯 들어가 두 소녀의 청소년 시절을 지켜보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인종차별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가. 아니다. 둘러보라.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를. 우리 또한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지 않은지. 가해자로 인식되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 소설이 왜 사랑받는지 알겠다. 아프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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