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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역사는 작가들에 의해 재생된다. 나와 연관된 게 아니라고 여겨 스치듯 지나쳤을 일도 작가가 만드는 이야기에 빠져들고 만다. 찾아 읽은 후 마음속에 새기며 오래도록 기억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작가가 만든 세계에서 경험하고 마치 그 시기에 있는 듯 여긴다.
‘파독간호사’라는 말은 꽤 오래전부터 사용해왔고, 지금도 다른 언어로는 좀처럼 생각하지 못할 지나간 우리의 역사다. 백수린의 첫 장편소설은 파독 간호사를 말한다. 현재와 과거의 나, 그리고 그 시절을 경험했을 파독 간호사의 이야기들을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 엿볼 수 있게 한다.
가스폭발사고로 언니를 잃은 해미의 가족은 아빠는 부산으로, 엄마, 해나와 해미는 독일로 향한다. 신학을 공부하려는 엄마의 독일 유학은 파독 간호사로 일한 행자 이모가 독일 의사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미는 언니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을 감추려고 늘 거짓말을 했다. 독일어가 능숙하지 못해 친구를 사귈 수 없었어도 가짜 친구를 만들어 엄마와 이모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눈치를 챘던 이모는 해미에게 레나를 소개해주었다. 파독간호사였던 마리아 이모와 선자 이모를 비롯한 파독간호사 이모들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 이모의 딸 레나와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와 친해지면서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를 시작했다.
소설은 과거의 해미가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기 위해 선자 이모가 쓴 일기의 내용과 K.H.가 어떤 이름인지 유추하고, 이모들에게는 파독간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다고 말한다. 현재의 해미는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둔 상태다. 헝가리 출신 사진작가의 전시회에 갔다가 대학 때 문학동아리를 함께 했던 우재를 만났다. 친구와 연인의 경계에 서 있던 그들은 자주 가까워졌다가 어떤 이유로 멀어졌던 관계다. 우재에게 이모들 이야기를 하며 오래전 독일에서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우재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오래전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다시 찾기 시작하며 해미가 놓쳤던 것들을 마주한다. 파독간호사들의 삶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 가족을 위해 고향을 떠났던 이유와 외화벌이 형태로 해외 인력수출의 일환이었다. 파독간호사로 있던 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근로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제도에 반대해 간호사들은 서명운동으로 이주 노동자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도 알 수 있었다.
상실의 고통이 인간관계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결정의 순간, 주저하게 만드는 거였다. 우재와의 관계도 늘 한발 뒤에 서 있었다. 우재가 다가서려는 순간 멈췄다. 아직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다. 상실의 슬픔이 이렇게 크고 깊을 줄 몰랐다. 타인에게는 가벼울 수도 있는 감정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심연에 남아 있었던 거다.
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227페이지)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는 행자 이모가 해미에게 했던 말이다. 저녁을 먹고 늘 산책을 했던 거리에서 우재를 만난 이모는 이제 해미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 잊을 때가 되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백수린의 장편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책을 펼치고 작가의 다정한 언어에 그저 감동했다. 책장이 넘어가는 게 아쉬워 자꾸 붙잡고 있었다. 책장을 덮고 작가만이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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