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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나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2
이주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8월
평점 :
어떤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옛집 그리고 현재 언니와 살고 있는 집. 방 하나 너머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하는 공간. 하나의 공간 속에서 각자가 하고 싶은 걸 하며 분위기에 순응하게 되는 공간을 그려본다. 숨겨둔 사건 같은 건 말로 하지 않고 그냥 담아둘 뿐이다. 비록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마음. 숨겨둔 마음에 침잠하여 울음을 터트려도 그냥 바라볼 뿐이다. 어쭙잖은 위로 같은 거 하지 않아도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 다시 평정심이라는 걸 갖게 되는 그런 마음들을 담았다.
둘에서 셋이 되면 변하는 게 있을까. 할머니와 유리, 유리와 언니, 언니와 언니의 동생. 이러한 관계에서 유리와 언니 그리고 재한 씨가 들어오면서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바닷가로 놀러 가기도 하는 등 관계의 변화가 온다. 셋은 불완전한 숫자인 것 같다. 짝이 맞지 않아서일까. 둘과 넷 사이의 셋. 셋이면 둘은 짝이 될 수 있지만 하나가 남는다. 남은 하나는 쓸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혀 쓸쓸하지 않다면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는 거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는 공간에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관계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326/pimg_7202231433798200.jpg)
나는 괜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을 하기도 하고 뭔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휴대폰을 보기도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을 해놓고서,
누구 기다려요?
할머니가 물어오면
아뇨!
하고 급히 대답하곤 한다. 그러면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갈 길을 가신다. (51페이지)
유리는 휴무일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몇 년 전에 할머니와 살았던 시골집에 간다. 지금은 다른 할머니가 사는 집. 집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집 밖을 한 바퀴 돈다.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무슨 이유로 옛집으로 향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말할 필요를 못 느끼는 듯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면서도 말해주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고 만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주네. (9페이지)
소설의 첫 문장처럼, 괜찮다고 말해주는 소설 같다. 아픔을 드러내지 않아도, 말없이 이해와 공감을 해주는 사람들. 따로 또 같이 행동하는 이들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유리와 언니가 밤 산책할 때 굳이 나란히 걷지 않아도 괜찮다. 거리가 조금 벌어져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도 아무렇지 않다. 결국엔 함께 집에 돌아갈 것이므로 괜찮다. 함께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말이다.
그날은 딱 이 정도로 쌀쌀한 날이었다. 어제의 쌀쌀함도 내일의 쌀쌀함도 아니고 딱 오늘 정도의 쌀쌀한 온도와 바람. 나만 알 수 있는 똑같은 날씨를 만나면 나는 잠시 그 어느 날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따뜻한 밥과 국과 물과 아이스크림과 새 칫솔을 떠올린 뒤 다시 나온다. (94~95페이지)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326/pimg_7202231433798202.jpg)
재한 씨가 바다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어올 때 유리는 지나고 싶은 터널을 들러줄 수 있는지 묻는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을 지나면 언니는 쓰고 싶은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해서다. 이해와 배려가 배어난다. 긴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변하게 될까. 쓸쓸했던 감정 따위 파도를 향해 버릴 수 있을까. 따로 또 같이 어울리며 사는 게 우리 삶인가 보다.
아무리 외롭고 쓸쓸해도 나를 위하는 사람 때문에 오늘을 사는 것 같다. 친자매가 아니어도 복권 당첨금을 나눠줄 수 있는 사이, 살아온 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내도 조용히 듣고는 합격을 말해주는 사람 때문에 오늘을 버틸 수 있다. 쓸쓸함을 내비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이해하며 공감의 몸짓을 하는 것.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뭇국을 끓여내듯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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