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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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분다.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 한기로 몸이 움츠러들지만, 흙냄새를 풍기는 첫 봄바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루실의 모습을 그려본다. 컨버터블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루실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서른 살의 루실은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샤를 덕분에 무위의 삶을 산다. 한때 일을 했으나 샤를이 주는 부 때문에 루실은 제법 편한 삶을 산다. 어느 파티에서 루실은 디안의 나이 어린 연인 앙투안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렇다고 루실이 샤를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다. 샤를은 편안함으로, 앙투안은 격정적인 마음으로 사랑한다.

 


앙투안에 대한 사랑이 점점 격정적이 되면서 샤를에게 알려야 할 때가 온다. 앙투안은 자신과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간 후 샤를과 함께 밤을 보낼 루실을 생각하면 질투의 감정에 휩싸인다. 샤를에게 말하고 자기와 함께 살기를 바라지만 샤를은 루실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그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앙투안은 루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그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렇듯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이런 끝도 없는 무위를 루실에 대한 열정으로 견디는 것과 달리, 루실에게는 이런 삶의 방식이 그녀의 뿌리 깊은 천성에 보다 근접해있으리라고 느꼈다. 마치 불가해한 짐승, 처음 보는 식물, 만드라고라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192페이지)

 


루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즉 무위의 삶이 행복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우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앙투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루실의 삶을 걱정했다.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랐다. 우리들 대부분처럼. 일을 해야 우울해하지 않고 삶과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인간은 자기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자기 방식대로 살기를 바라고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그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무위에 대한 무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주 순간적인 것에도 금이 가는 법이다.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삶의 방식이 다르다고 하여 배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다. 그 사람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자꾸 바꾸려 든다. 바꾸려 들면 다른 방법을 택하는 게 인간이다.

 


삶에요. 남들이 삶이라 부르는 것에요. 샤를, 그러니까 인간은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걸까요, 불행한 열정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존재하기 위해 일하고, 돈을 벌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걸까요? (103페이지)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가 보다. 루실이 낮에 앙투안을 만나는 일은 그렇다 치고 루실과 앙투안이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루실의 행동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무위의 삶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건 아주 잠깐이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그 시간을 갖기 위해 가지고 있던 걸 몰래 팔고, 거짓말을 시작하는 부분에서 루실이 가진 감정의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앙투안은 나처럼 보통의 인간이었던 거다. 루실의 삶은 루실만 이해할 수 있는 거고, 그런 루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샤를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 듣지 않고 암시만으로 이해한 것을 잊지만, 완전한 침묵은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부조리한 걸 의미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잊는다. 루실은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년 시절의 편린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224페이지)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인간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사랑과 결혼, 혹은 연인 관계에서 일어날 법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이별에 관한 장면은 예견하지 못했다. 이별이 이렇게 심플할 수 있는가.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이별이 이처럼 아름다워도 되는가 싶었다. 마치 이별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인 것처럼 여겨지는 건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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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4-0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