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산문
박준 지음 / 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계절 때문일까. 연이어 시인의 산문을 읽게 되었다. 시처럼 다가오는 문장 때문에 더디 읽으며 글을 즐겼다. 최근의 산문은 일기 형식이 대세인 거 같다. 박준 시인의 산문은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물론 일월 산문부터 십이월 산문까지 이어져 있으니 일기라고 해도 좋겠다. 가만가만히 전하는 마음을 온전히 받은 느낌이었다.


 

시작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문이 하나 새로

생기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중략)

 

시작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에게 그동안 익숙했던 시간과 공간을

얼마쯤 비우고 내어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열리는 문이 아닌

늘 안으로만 열리는 문

 

시작이라는 문 (15페이지)


 


 

 

한 편의 시다.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시작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건 두려움이 먼저, 설렘이 나중이었다. 시인의 말하는 걸 보았더니 그것은 역시 마음인가 보다. 마음에 문을 하나 만드는 작업이며, 그 문 안에서 서성거릴 마음조각들이 보여서 다독거려본다.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며 그다음에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침묵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게 되는 날이나 사무실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경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는다. 하지 않아도 되는 말, 마음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꺼내놓으면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공허하다. 침묵이 가진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작가가 좋아하고 따르던 선생님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 침묵이 주는 편안함을 느꼈던 것처럼 귀한 게 있을까. 아무 말이나 하지 않아도 되고, 침묵에서 오는 다정함을 알았다는 말에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이 가져올 파장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을 고르는 것은, 곧 그 말을 들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126페이지)


 


 

 

바둑이점이라는 부제가 붙은 오월 산문을 읽다가 드는 생각이다.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얼굴의 점은 그려야 할까, 빼야 할까. 그 사람을 나타내는 표식과도 같아서 당연히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눈썹과 눈꼬리가 만나는 곳에 점이 있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아 피부과에 가서 점을 뺀 적이 있다. 시인의 얼굴에 있는 바둑이점은 커가며 점점 넓어지고 옅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슬프지 않는 일을 함께 슬퍼해달라는 표현에 그만 웃고 말았다.


 

예술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박준 시인의 글에서도 술과 해장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콧 피츠제럴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레이먼드 카버의 술에 관한 책을 말한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도 천상병 시인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 공감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술을 즐겼던 분들의 해장법이 궁금해졌던 모양인데, 글쎄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김수영 시인의 해장법은 기억해둘 만하다. 김수영 시인은 술을 마신 다음 날, 조를 갈아 죽을 쑤어 먹었다고 한다. 부드러운 죽이 들어가면 위벽을 보호해 좀 더 낫지 않을까 동감하는 바다. 조를 갈아야 한다는 수고가 따르겠지만 한 번쯤 시도해보고 싶다.

 


계절의 안부를 읽으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머무는 자리마다 기억 조각들은 훗날 추억이 된다. 어느 시간으로 잠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이처럼 안타깝지도 않으리라.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한 법. 우리가 사는 현재가 곧 우리의 과거가 되며 시간이 모여 우리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귀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계절산문 #박준 #달출판사 ##책추천 #책리뷰 #도서리뷰 #북리뷰 #산문 #산문집 #시인에세이 #에세이 #산문추천 #도서 #리뷰 #서평 #문학 #에세이추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1-17 1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작 부분 잠깐 들춰봤는데 좋았어요
따뜻한 느낌?

Breeze 2022-01-17 13:04   좋아요 1 | URL
산뜻하고, 다정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