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타프 도쿄 - 온다 리쿠

에피타프 도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7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자기 자신을 흡혈귀라고 말하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하여 파악하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흡혈귀라고 말하는 요시야는 작가 K와 함께 도쿄의 묘비명을 찾아다닐 뿐이다. 누군가의 목에 날카로운 이를 들이대 흡혈을 하지는 않는다. 흥미진진한 건 작가 K가 추구하는 작품이다. 작가 K는 희곡의 제목으로 <에피타프 도쿄>를 생각했다. 작가들이 자신의 묘비명으로 사용한 유명한 문장들을 살피며 골몰했다. K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제목 때문에 작품을 쓰기로 했다. 도쿄의 묘비명으로 '그때가 좋았다'라고 할까. 아니면 '꽃 밑에서'가 도쿄의 묘비명으로 더 어울릴까. 작가의 머릿속을 휘감는 희곡의 내용이 도쿄를 여행으로 이끌었다.  

작가 K가 쓰는 희곡 <에피타프 도쿄>에서는 도시락을 싸는 여성들로 구성된 살인 청부업자들이 나온다. 서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들은 한 곳에 모였다가 흩어졌다. 누군가 사라져도 이름을 묻지 않는다. 희곡 <에피타프 도쿄>는 색깔을 구분해 사용했다. 요시아의 시점으로 쓰인 도쿄에 얽힌 이야기 ‘드로잉 drawing’도 다른 색으로 되어 도쿄의 다른 기억들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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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어울리는 묘비명은 무엇인가. 

작가 K와 요시야가 둘러보는 도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도쿄의 헌책방 거리에서 거울 속에 비친 요시야를 발견하고 미행을 시작하였으나 K를 미리 발견한 요시야가 그를 술집으로 이끌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도쿄에서 살아온 요시야는 그가 살았던 곳에 가면 그리움이 먼저 앞선다. 이를테면 어느 호텔 방에 들어섰을 때 자기가 죽은 곳이었다는 걸 저절로 느끼게 된다. 동생과 만날 때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흡혈귀라는 말을 한다. 요시야는 누군가 자기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다른 흡혈귀들처럼 피를 마시지는 않지만 자기가 도쿄에서 오래도록 살아왔다는 걸. 과거의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작업을 하는 건 작가 K도 비슷한 것 같다. 작은 테이블을 좋아해 골동품 상점에서 사 온 적도 있다. 표면이 벗겨지고 흠집이 있어도 옛 물건을 좋아했다. 

작가답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 속 고료 씨를 말했다. 요시야는 아베 고보의 <불타버린 지도>를 떠올리며 가슴을 뛰는 것을 느낀다.

도시가 간직한 기억의 밑바닥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20년 가까이 사용한 곡물 식초가 떨어져 같은 것을 사려 도쿄의 골목을 헤매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이름만 달리해 편의점에서 독점 판매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물건을 만들고 판매에 이르는 과정 즉 시장원리를 깨달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도쿄 올림픽 2020이 올해 개최되었다. 올림픽 장소가 도쿄로 결정되던 때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쩐지 작가의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때문에 한 해를 연기했던 올림픽이 2021년도에 도쿄에서 열리긴 했으나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안타까움이 들 정도였다. 올림픽에서 성적을 떠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던 올림픽이었다.

도쿄는 지진과 쓰나미 경보가 자주 울리는 장소다. 도시 한복판에서 경보가 자꾸 울린다면 두려울 것 같기도 한데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북한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도 외국인이 보면 평온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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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는 아주 쉽사리 뒤바뀐다. 지방에 사는 이들에게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백중에 돌아오는 존재다. 도시에서 산 자로서 생활하는 이들도 귀성하면 어떤 의미에서 죽은 자로서 맞아 들여져, 죽은 조상들의 귀환을 함께 맞이하고, 다시 산 자로서 도시로 돌아간다.  (249페이지)

현재는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과거와 현재는 어쩌면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그 경계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혼재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간다. 가장 도쿄스러운 것을 찾는 작가 K의 외침이 허공에 울리는 듯하다. 도시가 가진 비밀 또한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가 걷는 길, 그 길에서 우리의 외침을 듣는다. 소설과 에세이, 르포와 희곡이 혼재하는 온다 월드로 이끄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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