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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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때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언젠가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트에 휘갈겨 쓴 적은 있었지만 왠지 정리가 안된 느낌이었다. 노트나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 건 굉장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글씨를 자주 쓰지 않기 때문에 손목이 아프고 펜에 맞닿은 손가락이 눌려 아프기까지 한다. 그런데 김훈 작가는 모든 글을 연필로 쓴다. 우리가 사랑했던 소설들도 연필로 썼다. 그래서 양장본 속표지는 작가의 육필 원고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 속에서 꾹꾹 눌러쓴 작가의 노고가 감동이었다.

 

김훈 작가의 산문을 오랜만에 읽게 되었는데, 그의 글에서 삶의 관조가 보였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작가의 경험과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를테면 일산의 호숫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과 똥에 대한 것, 그리고 세월호 사건과 촛불 집회 등에 대한 것들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11페이지)

 

일산 신도시에서 20년째 사는 작가는 칠십이 되었다. 그는 주로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두발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유치원 아이를 구해주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산신령 할아버지가 구해주었다고 말했다. 어느새 산신령 할아버지를 불린 이야기였다. 꾸미지 않는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져 그 소리를 들었을 작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배시시 웃고마는 광경들이었다. 

 

작가의 나이 칠십이 넘어서인지 곳곳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의 부모 장례식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고, 이제는 친구의 장례식에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서 죽음은 태어난 시기와 상관없이 가는 것. 작가의 말처럼 죽음은 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말했다. 눈을 기다리는 까닭은 거리에서 연애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불어 젊은이들의 키스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나이를 먹으면 좀처럼 키스를 하지 않는 것, 연애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나이 든 사람만이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들을 바라보는 게 노인의 기쁨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 연애라는 감정이 무디어진다. 키스와 연애는 젊은이들의 특권처럼 여겨지는 게 가장 활발한 연애를 하는 시기때문에 아닐까.

 

집집마다 나오는 똥과 그것을 치우는 청소과 직원들. 야미똥꾼에 얽힌 이야기와 건강의 척도를 가늠했던 똥의 역할 들을 말했다. 왕의 변기를 매화틀이라 일컫는다. 왕이 어딘가로 행차했을 때에도 매화틀을 들고 따라오는 이가 있었다 한다. 어릴 적 똥차가 지나가면 코를 막고 피했던 게 생각난다. 그 이전 세대에는 똥을 퍼 나르기도 했다. 야미똥꾼인 아버지를 두었던 친구 병수의 이야기에서 똥에 대해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분이나 계급, 남녀노소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청소2과장의 말을 빌려왔다.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장면들을 글로 보는 느낌이었다.

 

 

내용 속에 '오이지를 먹으며' 라는 게 있다. 오이지를 오이 김치로 받아들였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소금을 이용한 오이장아찌 같았다. 무더운 여름 날 오이지로 달랬다던. 올 여름에 한번 담아볼까 싶었다. 입맛 없을 때 오이지로 입맛을 돋을 수 있을까. 어른의 입맛과 나의 입맛이 다르긴 하겠지만, 어쩌면 비슷한 또래인 아빠가 좋아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그가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생각은 많은 것들을 나타낸다. 어느 한 시기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들. 나이가 든 사람만이 느끼는 것들. 이를테면 죽음을 바라보는 것들이다. 아무래도 나이 칠십 정도 되면 죽음이 머잖았다고 생각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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