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입양아 동생이 죽었다. 집에서 뛰쳐 나와 뉴욕에서 생활하고 있는 헬렌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숙부 님은 입양아 동생이 자살했다고 했다. 왜 양부모가 아니고 숙부가 전화했는가. 어릴 때부터 심한 구두쇠에 가까웠던 양부모의 생활습관 때문에 가난하지는 않았으나 몹시 절약하며 살았다. 예를 들면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 놀잇감을 찾아 밖으로 나가야 했다. 양부모에 대한 반감으로 유년 시절에 살았던 집을 뛰쳐나와 뉴욕에서 살았고, 양부모에게는 단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유년시절의 집으로 찾아오며 소설은 시작된다. 

 

입양이란 건 아이를 가진 사람이 키울 능력이 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키는 경우다. 자신을 버린 친부모를 전혀 찾지 않았던 헬렌은 양부모 또한 사랑하지 않았던 듯 하다. 어쩌면 지겨워했을 수도 있다. 백인들 틈인 세상에서 동양인으로 살아가기가 버거웠을 터. 생물학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는 한국인 입양아인 남동생에게는 그래도 동질감을 느꼈던 탓일까.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가 더 남동생과 가깝다고 여겼다. 죽기 얼마전에 뉴욕의 원룸으로 찾아왔던 거 하며 짧은 문자 메시지를 주었던 것들을 떠올린다. 사람은 그 사람을 잃고서야 그의 흔적을 찾기 마련인가 보다.

 

 

 

헬렌은 같은 한국인 입양아라서 동생에게 더 애틋했던 것 같다. 동생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 동생의 방을 들여다보고 동생이 알았던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헬렌이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동생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없었다. 헬렌 또한 동생의 진정한 모습을 모른다는 걸 알아가기 시작한다.

 

입양아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면서 현재 헬렌의 상황이 나온다. 문제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다. 부자 동네에 가서 옷, 신발 등을 주워 입으면서 양부모가 주는 생활비를 계속 받아쓴다는 거다. 양부모를 멀리하고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주지하면서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백인이 되고 싶다고 했던 남동생, 역시나 백인이 되고 싶었던 헬렌. 동양인이라는 사실이 실망스러워 누군가 국적을 물으면 입양아라고 대답했다. 유년 시절의 집에 돌아가서도 양부모에게 말 한 마디 다정하게 건네지 않는다. 남동생의 죽음이 마치 그들에게 있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도 헬렌보다는 남동생을 나름대로 더 사랑했던 것 같은데 남동생이 죽은 이유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남동생의 방에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모든 데이터는 지워졌다. 휴지통을 뒤지다가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문서에는 유서로 보이는 글이었다. 친엄마를 찾지 않겠다는 헬렌과 달리 동생은 친엄마를 찾았으며 만나러 갔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헬렌은 양부모를 부모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항상 양부모였고, 항상 입양아로 표현했다. 입양아라는 표현에서 그들이 느꼈을 차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헬렌이 기억하는 양부모는 그들에게 애정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굉장히 냉정하고 구두쇠로 그려졌지만 남동생이 죽은 뒤의 양부모는 늙고 자주 우는 모습을 보인다. 양부모를 거부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울며 말하는 모습에서 발견한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합니다. 라는 말은 주인공 헬렌이 자주 쓰는 말이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 백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움츠러든 표현과 불안은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의 배경 때문에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읽힌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은 회고록이 아니라는 말로 일축했다 한다.

 

헬렌의 양부모처럼 자기 방식대로 자식들을 사랑하는 부모가 많다. 대부분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어느 한 계기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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