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 영 ZERO 零 ㅣ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카페에 앉아 이별 의식을 치르고 있는 남녀를 바라보는 건 그다지 좋은 감정은 아니다. 둘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질 수 있지만 깊게 들어가보면 다른 양상을 띄기도 한다. 성연우가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나'가 잘못한 것들을 읊고 있다. 순진한 것처럼 혹은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는 '나'.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성연우의 말을 들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의식한다. 특히 이제 막 들어온 사십 대 남자를 주시하면서 자신의 말을 듣는 걸 알 수 있다. 완벽하게 적절했다라며 주변 사람들을 의식한 '나'의 행동은 매우 놀라울 뿐이다.
이런 사람과 곁에 있다보면 매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명문 대학 독일문학을 전공한 '나'는 학창시절에 알았던 이민희가 암에 걸리자 그의 강의를 물려받았다. 그러면서 이민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말한다. 독일에서 4년간 살았을때 김명훈에 대해서도 말한다. 김명훈을 어떻게 자기 무리로 끌여들였는지, 그리고 독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혼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명훈의 아버지에 대한 것까지.
모든 사람을 자기 계산하에 다루고 행동하는 '나'를 바라보는 건 유쾌하지 못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새롭다. 아주 나쁜 축에 드는 주인공임에도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듯 보이지만 자기 마음 속 욕망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는다. 강의실에서 신입생 티를 벗지 못한 박세영을 눈여겨 보는 장면은 '나'에게서 뭔가 다른 것을 발견 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하지막 본연의 성격을 버리지 못했는지 '나'는 박세영을 깊은 늪까지 데리고 갈 정도로 그녀를 닥달한다. 글 쓰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걸 알아챘지만 마치 질투의 화신처럼 다른 걸 하게 만들었다. 산문에 어울리는 박세영을 시 쪽으로 재능이 보인다며 다른 쪽으로 유인해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든다는 거다.
일부러 나쁜 사람을 만들어내듯 탄생된 캐릭터 같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은후 엄마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게 되면 그녀가 가진 악마성에 놀란다. 어떻게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냈을까.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그녀의 행동은 자못 순수해 보이고 효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거대한 욕망은 타인을 조종하고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은 뒤에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게 그녀의 특기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불행을 바란다.
그것은 진실이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다. 김지영 선배는 미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사람들은 누구나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길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120페이지)
김사과의 단편은 몇 편 읽었지만 어떤 작품이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던 차에 읽은 이번 작품은 자못 상큼했다. 이러한 독특한 캐릭터를 좋아하기 때문에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더군다나 뒷편에 실린 작가와 평론가 황예인 과 나눈 대담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왜 박세영을 괴롭혔는가에 대한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나'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헤어지겠다고 말하는 성연우와 엄마 만이 그녀의 욕망과 정체를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또 한 명을 짓밟고 다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그녀는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누군가를 밟고 이용하며 기간이 다했을때는 과감히 버리는 행동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