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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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의 소설을 읽어오며 느낀 점은 그가 조선왕조실록을 소설로 나타낸 특별한 작가라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해서 왕의 이야기가 아니다. 의금부도사 이명방을 주축으로 한 백탑파를 말한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는 백동수, 박제가, 박지원, 정약용 그리고 김진이 등장한다. 추리 형식의 소설로 정조 시대의 인물들과 그 사회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의금부도사이자 밤낮으로 쥐 수염의 세책방에 다니며 책 읽기를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소설을 쓰는데 여념이 없는 이명방의 시점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세책방에 나온 소설만으로도 총 121편이 나온 대소설가 임두에 대한 명성은 자자하다. 23년간 하나의 작품 <산해인연록>이라는 대소설을 집필해 온 작가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가득한 이명방은 김진의 부탁으로 그가 그린 그림을 들고 작가의 집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는 어여쁜 젊은 여인과 문을 열어준 여인, 그리고 늙은 여인을 맞이했다. 그가 소설을 쓴 작가라니, 외국의 문물을 접하고 온 선비일거라 짐작했지만 그러한 대소설을 쓴 작가가 한낱 여인이란 게 이명방에게는 놀라웠다. 

 

자기가 쓴 소설을 가지고 갔으나 서슬 퍼런 임두 작가에게 놀라 조용히 놔두고 그 자리를 나왔을 뿐이었다. 꽃에 미쳤다 하여 화광이라 불리는 규장각 서리 김진으로부터 받은 물건을 가지고 갔었다. 그가 그린 그림이 임두 작가의 <산해인연록>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는 임두 작가에게 달렸다. 작가는 그림에 맞지 않다며 화광의 그림을 내쳤고 그길로 나온 참이었다. 이명방은 김진의 권유로 궐에 들었고 금상의 후궁 의빈과 만나 임두 작가의 작품을 계속 쓸수 있는 방안을 들었다. 이후 임두 작가가 사라지고 <산해인연록> 199편을 이을 200편의 작품을 완료하지 못하게 되었다.

 

의빈과 혜경궁은 임두 작가가 소설을 쓸 당시 원한 건 한 가지였다. 황족이 등장할 경우 남녀 불문하고 요절시켜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흔 살을 넘기게 하겠다는 것 또한.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의 정실인 창화 공주가 십몇 년 동안 병석에 누워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임두 작가는 매병(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고 궁궐에서 원하는 내용대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다.

 

소설이 자유롭기 위해선 소설가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국가에 의해서든 사회에 의해서든 경계를 짓고 틀에 가두는 모든 규정에 반대한다는 것. 그 반대 목록엔 스스로 정한 틀도 포함된다는 것. 거대한 화두가 내 몸 전체를 짓누르는 듯 했다. (1권, 122페이지)

 

 

 

'소설은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온몸과 온 마음을 매일매일 아낌없이 내던지는 고된 작업! 그렇게 내던지기 위해선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한다. 특히 잘 먹어야 한다. 소설 쓸 시간 아낀다고 굶는 것보다 한심한 짓은 없다. (1권, 262페이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한자로 된 글은 주로 양반들이 읽었으나 언문으로 된 소설의 주 고객은 여성들이었다. 세책방에서는 사람을 시켜 소설을 필사하였고 필사본을 기다리는 고객 또한 여성이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소설을 필사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책들을 읽어야 가능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었듯, 소설 속 작가 임두 또한 수많은 작품들을 읽고 필사했다. 그러했기에 23년에 걸쳐 199편의 소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의 집필실에 걸린 수많은 작품속 인물들의 연결고리, 서재에 정리된 책의 목록들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작가는 소설을 읽고 쓰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저력을 표현했다. 물론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마음이 이 소설에 많은 부분 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우리, 소설을 쓰는 작가 또한 하나의 독자임을 강하게 피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명방 또한 대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모해마지 않은 임두 작가를 방문할 때 자기가 쓴 소설을 가지고 갔으며 작가의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다.

 

 

 

작가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나무와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물론 작가가 쓰는 작품이 독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서로의 접점이 없기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취향이란 게 존재하니까. 여성이 사랑하는 소설을 쓰기에 여성 만큼 그 사정을 아는 경우도 드물다. 여성들이 읽는 많은 작품들이 여성에게서 태어났다는 가정하에 이 소설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의 챕터는 『대소설의 시대』라는 제목에 걸맞게 유명한 대소설의 제목을 차용했다. 전혀 알지못한 제목으로 된 소설의 제목들은 작가가 지은 제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100여편의 시리즈로 된 소설들이다. 그 많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소설을 쓰고 퇴고하는 작업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하지 않았을까 싶은.

 

사라진 임두 작가의 소설을 그의 제자들인 수문과 경문이 쓰기로 했지만 스승의 작품을 흉내내기만도 어려운 상황인 건 뻔한 사실이다. 수없이 작가의 작품을 읽고 베껴 썼으나 작가처럼 생각하는 드물 터였다.

 

마치 지상의 운명을 따라 소설을 써 나가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천상의 운명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시킨 겁니다....., 사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 두 가지 운명을 넘나들며 소설을 써 나갈 수 있는 소설가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2권, 147페이지)

 

끝이라 체념한 순간, 이어지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인생 하나는 소설. 소설이 끝나도, 그 소설을 쓴 작가와 그 소설을 읽은 독자의 이냉은 이어진다. 그리고 가끔은 소설이 끝난 뒤 새로운 소설이 이어지기도 한다. (2권 157페이지)

 

예상한 대로 소설이 흘러갈지라도 소설을 대하는 즐거움은 변함없다. 기대하는 바가 있고 작가를 믿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매병에 걸려 처음 계획한 소설들이 제대로 흘러가지 못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결국 결말은 독자에게 달렸는지도 모른다. 결말이 없는 소설에 자신만의 결말을 부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애타게 완결을 기다리는 독자에게 작가의 결말은 소중한 선물과도 같은 것.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그래서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소설처럼 재미있는 게 또 없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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