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자의 회상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로마의 현자로 불리던 그는 로마 빌라도 총독의 총애를 받았다.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시작되기 엿새 전부터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중요한 유월절을 앞두고 일어난 살인사건 때문에 살인자를 찾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로마군 백인대장을 죽인 마티아스는 안토니 요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성전 수비대 대장 조나단으로부터 성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밀정으로 파견된다. 유월절이 되기 전 사건이 해결되면 풀어주겠다는 조나단의 말을 믿었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마티아스는 그가 들어간 집에서 앞서 다녀간 사람을 발견했고, 그가 테오필로스라는 것을 알았다.

 

기독교를 잘 알지 못하는 내게 유월절이 무엇인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히브리 노예들을 풀어주도록 하기 위해 신은 이집트 인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렸다.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첫째 아이들에게 내린 죽음이었다. 모세는 히브리 인들에게 집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그 집을 피해가도록 했다. 이게 유월절의 시작이다. 집 밖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던 장면은 어떤 영화에선가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앞두고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로 성전의 문설주를 발랐던 것과 실로암 샘물를 피로 뒤덮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던 거다.

 

테오필로스와 함께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마티아스는 사건의 실체가 갈릴리 출신의 예수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예수의 제자들을 탐문하던 마티아스는 예수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유월절을 앞둔 예수가 열두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샬렘으로 일주일 전에 왔다.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일컫는 예수를 만난 마티아스는 그가 그저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힘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성경에서 나온 대로 예수의 제자들은 행동하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음이 드러났다. 마티아스는 예수를 만나 사건을 조사하며 그가 한 말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마티아스는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아버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린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1권, 278페이지)

 

유월절에는 로마 총독에게 유대인 죄수를 한 명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다. 빌라도는 자신이 죄인을 선택하지 않고 군중들에게 맡겼다. 군중들은 예수를 선택하지 않고 살인자 바라바를 선택했다. 이 또한 성경에서 나타난 바와 같다. 유월절을 일주일 앞둔 기간부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유월절 기간 까지의 내용을 소설에 담았다. 팩션 형식으로 추리 형식의 글이었다. 살인자를 찾아가는 주제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다가왔던 예수에 대한 기적과 행적들을 담았다.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예수의 고뇌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 왔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여겼던 그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나 있다. 인간적으로 다가왔던 예수의 모습이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 내게 이 책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겠지만 성경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감동으로 다가오리라 여겨졌다. 하나의 소설처럼 성경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알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다고 봐야겠다.

 

'내가 그를 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난다' (2권, 200페이지) 

 

 

'하나뿐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왔으니 그가 흘린 피로 인간의 죄를 씻을 것이다.' (2권, 215페이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2권, 238페이지)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와 픽션을 가미해 팩션 소설을 주로 써온 이정명의 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 다소 어려운 면도 없잖아 있었으나 기독교적인 소설로 읽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 글에 대한 리뷰를 써야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 자칫 잘못 비춰질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웠다는 점이 컸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는 왜 이 소설을 썼나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인물이 아니고 왜 유월절의 이야기를 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의 의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종교는 마음을 지탱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내세를 기다리는 즉 천국에 도달하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을 수도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세에 대한 기쁨으로 승화시키는게 종교의 힘이 아닐까 한다. 예수가 하나님에게 갈구했던 삶에 대한 간구가 특별히 다가왔던 이유와도 같다. 예수를 죽임으로써 사람들에게 인간의 죄를 사함을 보여주려 했던 신의 바람을 깨달아서 일까.

 

살 수 있었음에도 직접 진실을 말하겠다며 도망치지 않았던 마티아스의 깨달음과 강한 믿음, 그리고 마티아스에게 내렸던 예수의 축복이 가슴뭉클해지는 느낌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 같다. 마치 통곡의 눈물을 흘리듯 뭉클함을 느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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