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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 빠지다
김상규 지음 / GenBook(젠북)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책에 담긴 우리말은 꼭 ‘꽃’ 같았다. 매일 하는 말 속에서 흔하게 쓰는 우리말들이 저자 김상규의 맛깔스런 입말을 통해 역사와 재미를 담은 탐스러운 꽃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구성은 단순하다. 자주 쓰는 우리말을 소개하고, 역사적 유래를 설명한 후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의미를 찾는다.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다가 잠깐 소개되는 ‘우리말 나들이’처럼 짤막한 글 덕에 독자는 우리말을 배우지 않고 우리말에 빠진다. 너무나 흔해서 유래와 의미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단어마다 깊은 뜻이 담겨 있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녹아 있다.
백성의 마음을 춥고 힘들게 했던 을사년. 거기에서 유래한 ‘을씨년스럽다’는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하고 흐린 것을 의미하는 말이 됐다.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던 때, 미군 부대에서 나온 유통 기한이 지난 고기나 통조림을 일컫던 ‘부대고기’. 굶주림에 시달리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부대고기를 넣어 요리한 음식이 ‘부대찌개’라니. 생각 없이 내뱉던 말들이 이제는 결코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편안함이다. 입말로 쓰인 글은 결코 어렵게 읽히지 않는다. 분주한 아침 시간에 듣는 라디오처럼, 온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도 쉽고 편안하게 귀에 들어온다. 유래를 통해 듣는 역사 이야기는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다.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맺음말은 새해의 덕담처럼 훈훈하면서도 따끔하다. 독자가 보는 것은 단어 하나지만 하나의 단어 속에 과거가 녹아 있고, 현재가 흐르고, 미래가 보인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표지 때문에 독자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 책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더욱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어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우리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우리말을 다룬 책을 사보며 재미를 느끼는 독자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우리말에 빠졌고, 이제는 헤어나와 몸에 젖어 있는 우리말들을 더 많이 사용해 볼 참이다. 우선 대학로에서 자주 들르는 '중국 호떡'집부터 가봐야겠다. 우리나라에서 청나라, 원나라 등 만주족과 관련된 용어에 붙이는 말이 ‘오랑캐 호’고, 중국 떡과 구별하고자 ‘호’떡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맛난 호떡을 먹으며 아주머니와 나눠보고 싶다. 늘 그렇듯 작은 실천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