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포트 - 여름 고비에서 겨울 시베리아까지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말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일상에서는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여행을 한다. 그리고 '여행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대답한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자극을 얻으려는 방편일 수도, 지루한 일상에서 도피하기 위한 탈출구일 수도 있다.

서점에는 여행자의 로망을 충족시켜주려는 책이 넘친다. 뉴욕의 최첨단 유행을 눈으로 확인하고 파리의 분위기와 낭만을 훔치도록 돕는 여행서, 세련된 스타일로 쿨한 도시를 누비는 여행서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런데 여기, '여행은 고행'일 수도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 있다. 여름 고비에서 겨울 시베리아까지의 여정을 담아난 시인 김경주의 여행산문집, <패스포트>(랜덤하우스. 2007)다.

장소부터 독특하다. 고비와 시베리아라니. 고비의 여름은 불타오르고, 시베리아의 겨울은 냉혹하다. 고비에서 시베리아라는 여정에는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철저히 고독하겠다는 가정이 담겨 있다. 고독한 여행자는 유목의 땅인 고비에서는 걷거나 지프를 탔고, 유형의 땅인 시베리아에서는 기차를 타거나 걸었다. 걷고 또 걸으며 여행의 기억을 발에 새겨 돌아왔다.

독특한 것은 장소뿐이 아니다. 쉽고 친절한 안내를 기대하며, <패스포트>라는 여권을 손에 쥔 채 여행을 시작한 독자는 이내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 고비와 시베리아가 어떤 곳이고, 그곳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가게에 들러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시인 김경주'라는 사람의 의식의 흐름, 이 하나의 물줄기만 조용히 흐를 뿐이다. 그 흐름에 자기를 맡길 것인가, 미리 빠져나올 것인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여기서 독자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바쁜 일상에서 여행을 위한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간접경험이라도 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야겠기에 읽는 여행서 아닌가. 이 책은 '여행산문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한 편의 장편서사시처럼 느껴진다. 403쪽을 채운 것은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아닌 저자의 내적 사유다.

거기에 함축적인 문체, 한 번 읽어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표현들은 독자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멋스런 사진과 깔끔한 편집, 정보 전달에 치중하느라 정작 글쓴이의 생각이 빠져 있는 여행서는 인제 그만을 외치는 독자라면, 이 책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청춘과 사랑의 기억, 사람과 길에 대한 생각, 고된 삶에 대한 고백, 거기에 고비의 먼지와 시베리아의 냉기가 묻어나는 쓸쓸한 사진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책, <패스포트>.

"나는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욕조에 들어가서 평상시 나의 집에서처럼 앉아 있어본다. 그리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물담배를 한 대 피운다. 등단을 한 후 야설 작가와 대필 작가를 전전하면서 내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집에 욕조를 하나 갖는 것이었다. 욕조에 들어가서 몸을 따뜻하고 편안한 물의 질감의 한가운데로 가라앉히는 상상을 하면서 그 시절을 견디곤 했다. 그때 내게 사막은 따로 있질 않았다. 사막의 한가운데 있는 욕조에 들어와보니 사막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거대한 욕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막은 저 혼자 너무나 은밀했고, 다급했고, 황망해서 이 욕조로 밤마다 들어와서 인간의 영역을 상상하곤 했을 것이다. 공허를 바라보는 일은 이렇듯 서로 닮아 있고 대개 그러할 것이다."

패스포트passport는 우리말로 여권(旅券), 즉 나그네의 문서라는 뜻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우리가 나그네의 생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표현했다. 이름, 사는 곳, 직장에서의 지위가 나라는 사람을 규정짓는 시대다. 나그네의 문서 <패스포트>를 읽는 동안은 과감히 '나그네'라는 수식어로 나를 꾸며주는 건 어떨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나그네가 되어 고비 사막과 시베리아를 배회하다 보면 일상 속에 묻혀버린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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