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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의 애정
시라이시 가즈후미 지음, 노재명 옮김 / 다산책방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둥둥. 두웅둥.
시작부터 상실의 공기로 가득 찬 이 연애소설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잃는 것과 그 경험이 주는 서늘한 공포에 대해.
시력을 '잃는' 것에 공포를 가진 소년, 서른한 살이 되도록 단 한 번의 연애를 했지만 그 사랑을 '잃어버린' 남자, 사랑하는 아내를 죽음으로 '잃었지만' 유령이라도 좋으니 그 아내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중년 남자. 아들이 시력을 잃을까 두려워 무엇이든 해야만 했던 엄마, 헤어진 후 5년 동안 100번의 마주침을 가장하며 사랑하는 이의 곁을 맴돌았던 한 여자,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인 채 차가운 온도 속에서 떠나가야 했던 한 사람의 아내.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랑, 사람들.
사랑을 잃을 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렇듯 실연의 공포는 실명의 공포와 닮았다. 하지만 정말로 실연했을 때, 공포는 사라지고 무서우리만큼 차분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제야 알게 된다. 정말로 잃게 되면 두려움에 떨고 있을 여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사와코상을 진정으로 잃은 순간 오가다 사장은 사와코상을 잃을 공포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잃을 공포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영원히 그 사람을 잃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 그 자체의 공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인간에게 더 크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공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얼마만큼의 애정>은 우리가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잃고, 또다시 사랑하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여느 일본 소설처럼 소위 '쿨'하고 담백하게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미련하다 싶을 만큼 사랑에 미친 사람, 사랑에 미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들이대며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사랑은 어떠하냐고. 너는 얼마만큼의 애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했고, 하고 있느냐고.
읽는 내내 나의 '그 사람'이 떠올랐다. 유일하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사람', 헤어지고도 환영처럼 따라다녔던 '그 사람', 졸업 후 2년 만에 찾아간 학교에서 우연처럼 또 내 앞에 앉아 있던 '그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잃었다. 자발적으로. 그리고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 새로운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온갖 오해와 자기 합리화로 가득 차 있는 말 뿐인 사랑, 지나고 나면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사랑, 들리긴 하나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사랑 속에서 나는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다. 본래의 내 모습을 잃은 채로.
<얼마만큼의 애정>은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많은 질문을 하며 사랑했던 나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누게 한다. 지나온 사랑을 차근차근 돌아보는 동안 깊숙이 눌러두었던 울음이 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슬픔의 울음이 아니다. 언젠가는 뱉어야 했던 것이기에 아픈 우리를 치유해줄 울음이다.
이 소설은 사랑에 빠진 순간처럼 잃어야 한다. 내 눈에 온통 그 사람이 가득했던 그 순간처럼.
'사랑한다' 말 한 마디 없이 사랑을 말하는 이야기.
끝에서 또다시 시작하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
결코, 흔해빠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