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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평점 :
“아마 다시는 이렇게 다디단 이야기를 쓸 수 없겠지만, 이 한 권이 있으니 더 먼 곳으로 가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지구에서 한아뿐>은 2012년에 나온 정세랑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었고, 위 문장은 2020년 개정판의 마지막 문장이다. 말 그대로 ‘다디단 이야기’였다. 그것도 지구 밖 외계인과의 사랑이라는 우주적 스케일의 달달함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푹 빠졌다 나온 후 나는 믿게 되었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하고 계속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런 사랑을 온 지구를 향해서 하는 인물이 바로 ‘한아’다. 서교동 골목의 작은 벽돌 건물 일 층에서 한아는 작은 옷 수선집을 운영한다. 가게 이름은 ‘환생’, 그 옆에는 ‘지구를 사랑하는 옷 가게’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수많은 옷이 싼값에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추억과 시간이 담긴 낡은 옷을 정성 들여 고치고 새롭게 탄생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 자기 브랜드를 갖게 될 거라고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자신의 속도와 신념을 지키며 조그만 가게에서 매우 행복하게 일하는 사람.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생활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 할 줄 아는 가장 심한 욕이 “미세 플라스틱 같은 새끼, 옥시녹세이트 같은 새끼”인 사람. 자신의 결혼식에 올 손님들을 위해 해초칼국수와 시래기수제비, 마파두부덮밥을 준비하는 사람.
한아뿐만이 아니다. 한아가 사랑하는 경민도, 한아의 절친인 유리네 부부도, 결국 이들과 연결되는 가수 아폴로까지도 모두 친환경적인 생활을 꾸려나간다. 작가 정세랑이 만든 세상에서는 친환경이 일상이고 상식이며, 인물들은 다양한 형태로 일을 한다. 그들이 꾸리는 가정 역시도 정상가족의 모습에 갇혀 있지 않다. 글을 읽는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한 작가의 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독자인 나는 이 건강하고 안전한 세상에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소설 밖의 내 삶도 그렇게 바뀔 수 있도록 조금 더 노력해보고 싶어진다.
스물여섯에 쓴 자신의 글을 다시 고치며 작가는 거의 모든 문장을 새롭게 썼다고 한다. 그 결과 2020년 판 <지구에서 한아뿐>은 더 조심스럽고 더 친환경적이며, 다양성을 더 넓게 품고 독자에게 돌아왔다. 덕분에 이름이 같은 두 권의 책을 비교해 읽으며 작가의 성장을 발견하는 기쁨이 크다. 꾸준히 쓰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꾸준히 성장하는 이 작가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하고” 사랑할 수밖에. 계속 읽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