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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소로의 철학!
얼마전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개봉을 앞두고 원작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두고 번역설전이 펼쳐진 적이 있다. 누군가는 제대로 된 번역이 없어서 직접 했다고 했고, 또 누군가 한 번역은 의역에 가까운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미소설 분야 최고의 번역자라는 타이틀이 붙기도 했다. 아무리 똑같은 텍스트를 번역한다 하더라도 번역자의 능력에 따라 더 재미있고, 더 쉽게, 더 바르게 번역할 수 있으므로 이런 번역설전을 단순히 웃어 넘길 수가 없다. 분명 이 중 하나는 선택해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월든』을 다시 펼쳐든다. 한기찬 시인이 번역한 『월든』의 개정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월든』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번역본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전문 번역가의 작품이었다. 고전 『월든』을 다시 읽으며 되새겨 본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이미 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번역본을 비교하며 읽을 수 밖에 없다.
일단 각설하고 『월든』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월든』은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2년 2개월 동안 고향 콩코드로 돌아가 월든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날들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거나 글을 쓰는 작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는 이런 것들을 뒤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던 것일까?
내가 숲속에 들어가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p.108)
소로는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일상을 단순화하면 우리 삶에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직접 오두막을 짓고, 농사를 하고, 직접 수확한 것들만 먹어도 충분히 삶은 가능하다. 좀 더 편리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더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삶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넘는 것들은 굳이 우리 삶 속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며 우리는 이런 불필요한 것들을 위해 마음을 쓰고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남는 여유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데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소로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오두막을 지은 비용, 1년동안 농사에 들어간 비용, 그리고 먹은 것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비용 계산을 해서 보여준다. 소로가 2년동안 살 수 있는 오두막을 짓기 위해 든 비용은 28달러 밖에 되지 않으며, 이는 하버드 학생들의 한달 기숙사비인 30달러보다도 적은 비용이다. 마음은 먹으면 충분히 적은 비용으로도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소로는 노동이 가장 정직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때도 일체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가축의 힘도 빌리지 않고, 비료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로는 부지런하게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김매기도 게을리하고, 1년에 일을 하는 일수는 고작 3, 40일에 불과하다. 노동이 가장 정직한 것이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일을 게을리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1년에 3, 40일만 일해도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욕심 부리지 않고 딱 그만큼의 일만 하는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책을 읽거나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사색에 빠지곤 한다.
『월든』은 이런 소로의 철학적 사유 뿐아니라 문학적으로도 가치있는 고전이다. 호숫가 숲 속에서 책을 읽고 숲과 동물들을 벗삼으며 지냈던 소로는 숲과 동물들을 아주 풍부하게 소개한다. 묘지의 노래를 부르는 부엉이, 전투를 벌이는 붉은개미와 검은개미, 사냥꾼과 사냥개에게 쫓기는 여우, 이상한 울음소리로 요란을 떠는 어미 들꿩 등 그와 이웃해 살고 있는 다양한 동물들을 그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묘사를 통해 텍스트 속에서 다시 되살아 난다.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그의 관찰력과 작은 장면 하나를 보고도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의 상상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놀라운 문장력의 어느 정도는 독서로부터 기인됐을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월든 호숫가는 사색을 하기에도 좋지만 진지한 독서를 하기에도 제격인 곳이다. 직접 집을 짓고 경작을 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그는 틈틈히 읽으며 책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등 서양고전뿐만이 아니라 『논어』나 『대학』 같은 동양고전도 열심히 읽었다. 아마도 그가 동양고전을 탐독했던 이유는 그의 생활과 철학이 동양의 그것들과 통하기 때문이리라.
어떤 이들은 요즘 같은 시대에 굳이 『월든』을 읽을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곤 한다. 그렇다. 소로가 살고 있는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150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월든』을 읽을까? 그것은 바로 그의 철학 때문이다. 듣기 좋은 말보다는 몸소 실천할 줄 아는 행동력,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여유. 지금 우리에겐 그런 미덕이 무엇보다 필요한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앞서 살짝 언급한 번역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살펴볼 텍스트는 밤에 숲 속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묘사한 부분으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임순례 감독이 『월든』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라고 꼽기도 한 것이다. 어느 번역본을 선택할 것인지는 결국 개인의 취향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다른 새들이 잠잠해지면 작은 부엉이들이 금속성이 섞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태곳적부터 비탄에 잠긴 여인처럼 '부어엉' 하고 운다. 그 음산한 울음소리야말로 벤 존슨을 연상케 한다. 한밤중에 마주치는 교활한 마녀! 그것은 시인들이 표현하는 정직하고도 무뚝뚝한 '부엉부엉'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장난기 하나 없는 더할 나위 없이 엄숙한 묘지의 노래이며, 자살한 연인들이 지하 무덤 속에서 꿈 같았던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회상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노래이다. 그래도 나는 그 부엉이들의 울음소리, 그 슬픈 응답이 숲 가장자리를 따라 떨려 나오는 소리가 듣기 좋다. 그것은 종종 음악과 노래하는 새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흡사 정말 노래로 불러야 할 것은 음악의 어둡고 슬픈 일면이며 후회이고 한숨이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들은 정령, 그것도 음산한 정령이며 우울한 전조이다. 한때 인간의 형상으로 밤마다 지상을 돌아다니며 나쁜 짓을 저질렀다가 이제 울음의 성가로, 또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비가로 고하며 속죄하는 타락한 영혼의 정령이다.
그들은 내게 우리 모두의 거처인 자연의 다양성과 포용력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알려 준다. "오오오, 차라리 태어나지 말 걸!" 호수 이편에서 한 마리가 그렇게 탄식하고는 절망과 불안으로 선회하며 잿빛 떡갈나무 가지에 올라앉는다. 그러면 호수 맞은편에서 또 다른 부엉이가 떨리는 소리로 진지하게, "태어나지 말 걸!" 하고 화답하고, 저 멀리 링컨 숲에서도 희미하게 "나지 말 걸!"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한기찬 옮김 p.149~150)
다른 새들이 조용해지면 부엉이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죽음을 곡하는 여인들처럼 부엉부엉하고 그들의 태곳적 울음을 시작한다. 그들의 음산한 울음은 그야말로 벤 존슨的이다. 교활한 한밤중의 마녀들 같으니! 그들의 노래는 시인들의 정직하면서도 투박한 노래가 아니라 실로 엄숙하기 짝이 없는 무덤의 노래이며, 동반 자살한 두 연인이 지옥의 숲에서 지난날 이승에서의 강렬했던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돌이켜보면서 서로를 위안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비탄, 그들의 구슬픈 응답이 숲의 언저리에 떨리듯 들려오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때로 나에게 음악과 노래하는 새들들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말 노래로 표현되기를 원하는 것은 음악의 어둡고도 눈물겨운 측면이며 후회와 탄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부엉이들은 정령이다. 한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밤마다 이 세상을 걸으면서 어둠의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제는 죄의 현장에서 탄식의 노래와 비가를 부르면서 속죄하고 있는 추락한 영혼들의 의기소침한 정령이며 우울한 전조인 것이다. 부엉이는 우리 모두의 집이기도 한 대자연의 다양성과 가능성에 대하여 새로운 느낌을 준다. "아,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 하고 호수 이쪽에서 부엉이 한 마리가 한숨을 쉬고는 절망과 불안의 심경으로 날아올라 한 바퀴를 돌더니 회색 떡갈나무들 속에 새로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러자 "… 태어나지 말 것을!" 하면서 호수 건너편에 있는 다른 부엉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응답한다. 그러자 또 "…말 것을!" 하고 멀리 링컨 숲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강승영 옮김 p.177~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