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비 딕 - 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5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8월
평점 :
모비 딕은 당신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어릴 때 『백경』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줄거리부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다면, 줄거리 부분은 건너 뛰고 읽으세요.
육지생활이 답답했던 이슈마엘은 상선에서 일을 해 본 경험을 살려 고래잡이 배에 타기로 합니다. 고래잡이 배에 타기 전에 들른 숙소에서 만난 식인종 퀴퀘그와 함께 같은 고래잡이 배에 타기로 하는데, 그 식인종은 유능한 작살잘이였습니다. 온몸에 문신이 있고, 문화도 다르지만 짧은 기간동안 이슈마엘과 퀴퀘그는 친구가 됩니다.
이슈마엘과 퀴퀘그가 승선한 피쿼드호에는 에이해브라는 선장이 있는데, 그는 예전에 고래잡이에 나섰다가 '모비 딕'이라는 흰 고래에게 다리 한 쪽을 잃었습니다. 모비 딕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한 에이해브는 고래잡이 보다는 모비 딕을 잡는게 목적인데,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에이해브 선장과 생각이 다릅니다. 하지만 에이해브 선장과 이미 그에게 동조하고 있는 수많은 선원들의 생각을 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합니다.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이 자주 출몰한다는 장소를 찾아 향하고 결국 모비 딕과 마주하게 되지만, 모비 딕에게 복수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비 딕이 배를 공격해 배는 침몰하고 모든 선원들은 죽었습니다.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슈마엘입니다.
"누구든 이마에 주름이 지고 아가리가 비뚤어진 흰머리 고래를 발견하면, 누구든 오른쪽 꼬리에 구멍 세 개가 뚫린 흰머리 고래를 발견해서 내게 알린다면, 그에게 이 금화를 주겠다!" (p.276)
"나를 파괴하고, 나를 죽는 날까지 의족에 의존해야 하는 불쌍하고 한심한 놈으로 만든 게 바로 그 빌어먹을 흰 고래다!" (p.277)
"저는 녀석의 굽은 아가리쯤은, 아니 죽음의 아가리라도 겁나지 않습니다, 에이해브 선장. 그게 우리의 정당한 용무라면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고래를 잡으러 여기 왔지, 선장님의 복수를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그래서 북수에 성공하더라도 기름을 몇 통이나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걸 잡아봐야 낸터컷 시장에서 큰 벌이가 되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p.278)
"말 못하는 짐승을 상대로 복수라뇨!" 스타벅이 소리쳤다. "고래는 단지 맹목적인 본능에 따라 공격했을 뿐이라고요! 에이해브 선장님, 그런 짐승에게 원한을 품는 건 신성 모독이나 다름없어요." (p.279)
이처럼 『모비 딕』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혹시 에이해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할거라 생각했다면, 정말 아쉬운 결말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복수의 결말은 정해져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거대한 자연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보잘 것 없는 우리 인간들이 이긴 적은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먼저 『모비 딕』의 줄거리를 정리한 이유는, 이 소설에서 줄거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비 딕』은 소설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여느 소설들과는 다릅니다. 『모비 딕』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 소설을 문학이 아닌 '고래학'으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고래나 고래잡이에 대한 사회, 과학적인 연구가 실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래나 고래잡이가 언급된 거의 모든 기록들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주었나 봅니다.
허먼 멜빌이 이토록 세세하게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제로 포경선을 탄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이슈마엘처럼 그는 포경선을 타기 전에 상선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미 해군으로 남태평양을 누볐던 적도 있습니다. 그가 소설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식인종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동틀 무렵에 깨어 보니 퀴퀘그의 팔이 내 몸에 얹혔는데, 그 모습이 다정하고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누가 봤더라면 내가 그의 마누라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불도 네모지고 세모진 작은 헝겊을 알록달록하게 잔뜩 이어 붙였는데, 그의 팔도 크레타 미궁처럼 끝없는 형상의 문신으로 뒤덮였고 색깔까지 제각각이었다. 아마 바다에서 생활하는 동안 햇볕과 그늘을 들락거리며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소매를 걷었기 때문인 듯했다. 그의 팔은 암만 봐도 조각 이불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실제로 처음 잠에서 깨어 이불 위에 반쯤 올려놓은 팔을 봤을 땐 구분이 어려울 만큼 색깔이 서로 어우러졌고, 퀴퀘그가 나를 끌어안고 있는 걸 안 건 순전히 무게와 누르는 힘 때문이었다. (p.69)
문신이 온몸을 뒤덮고 있고, 이상한 종교의식을 하는 식인종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피하곤 합니다. 이슈마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사실 퀴퀘그는 그들의 문화를 따를 뿐이지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슈마엘과 한 침대에서 잘 때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그를 배려하려 했으며, 이슈마엘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그를 도와주기도 합니다. 마치 퀴퀘그가 이슈마엘의 경호원인 것처럼요. 반대로 이슈마엘은 언어와 표현력이 딸리는 퀴퀘그의 대변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포경선의 침몰로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때, 이슈마엘을 살려낸 것도 결국 퀴퀘그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종교가 다르다고 하면 이교도라고 치부합니다. 하지만 이슈마엘은 퀴퀘그의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신성한 것이라고 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허먼 멜빌은 기독교에 대해 불경한 태도를 보인다는 지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허먼 멜빌은 특정 종교나 인종이 우월하다는 근거없는 생각과 배타적인 태도를 경계했고, 소설 곳곳에서 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이해브 선장이 복수에 눈이 먼 나머지 배가 뒤집히는 줄도 모르고 쫓아다녔던 모비 딕. 모비 딕을 쫓아다니느라 눈이 먼 사람은 에이해브 선장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또다른 '모비 딕'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소설 곳곳에 다양한 매력이 숨어있는 소설입니다. 특히, 저는 이슈마엘과 퀴퀘그의 만남이 인상적이었는데, 여러분들도 여러분만의 재미를 한번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