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우의 세 자매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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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미쳤다고 하는가!

『귀신들의 땅』으로 타이완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천쓰홍의 신작 소설 『셔터우의 세 자매』는 작가의 고향인 장화현을 배경으로 한 '장화현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다. '셔터우'는 구아버가 많고 양말이 많고 양말 공장 사장이 많은 곳이다. 미친 사람들도 많고, 샤오( 씨 성을 가진 사람도 많다.


소설의 주인공은 셔터우 지역에 살고 있는 샤오 씨 세 자매다. 세 자매에게는 이름이 없고 다만 1호, 2호, 3호라 불릴 뿐이다. 아버지는 한 명이지만 서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한날한시에 태어난 세 자매에게는 초능력이 있다.

1호는 시각적으로 타인의 미래를 볼 수 있고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다. 시각에 삭제 능력이 있어서 보고 싶지 않거나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만나면 자체적으로 눈앞의 장면에 안개를 분사했다. 그래서 딸의 시신도 보지 못했다. 1호는 가업을 이어 받아 삼합원에서 점을 봐주고 있다.

2호는 냄새를 통해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아낼 수 있다. 3번 결혼했고, 세 남편 모두 사고로 죽었다. 다행히 세 남편 모두 재산이 많아서 지금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3호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들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서 타이완 사람이 없는 파타야 해변에 리조트를 매입해 거주 중이다. 비록 게이 전용 리조트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세계로 왔다. 머리로도 이해할 수 없고 번역도 불가능해서 아무리 시끄러워도 여전히 조용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렇듯 능력이 제각각인 세 자매는 능력만큼 성격이나 외모도 다르다. 물론 어머니가 다른 탓도 있으리라.

한때는 구아버도 많고, 양말도 많고, 사람도 많았던 곳이지만 지금은 점점 쇠락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후투티'라는 새가 셔터우를 방문해 타이완 각지에서 촬영 동호회 사람들과 기자들이 몰려온 것이다.


"타이완 TV의 독점 보도입니다. 장화현 셔터우향에 희귀한 손님이 나타났습니다."

"후투티를 왜 중국어로 '다이셩'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이 사진을 봐 주십시오. 머리에 깃털관이 있습니다. '셩'은 고대의 머리 장식을 말합니다. 즉, 후투티는 머리 장식을 지닌 새라는 뜻입니다." _121쪽


조용한 마을에 후투티와 함께 외지인들이 몰려오면서 그들만의 방식(혹은 약속)으로 살고 있던 셔터우 사람들, 특히 세 자매에게 끊임없이 사건이 터진다. 타이완 소설은 처음이고, 배경 또한 조금 낯설어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까 따라가고 있었는데 나 역시도 이 사건에 휘말리면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스킬뿐 아니라 배경, 인물을 묘사하는 문장 역시 훔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전작을 읽어보지는 않지만, 천쓰홍 작가가 어떻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억은 선명한 연도 순이 아니다. 과거를 어떻게 연도 순으로 이야기할 수 있나. 기억은 매 조각들이 순서와 상관없이 어지럽게 합쳐져서 커다란 무덤을 이루고 있다. _156쪽


'후투티'가 어떤 새인지 궁금할지도 모를 분들을 위해 마침 몇 해 전에 내가 직접 찍은 '후투티' 사진을 올려본다. 표지에도 그려져 있는 후투티는 머리 모양이 독특하다. 처음 '후투티'를 발견하고는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뒀는데, 며칠 뒤에 실제로 기사로도 소개되어서 소설 속 사람들이 '후투티'를 반가워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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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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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간단후쿠는 나를 입고 자신의 것으로,

자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간단후쿠가 돼 눕고, 일어서고,

먹고 마냥 서 있고, 걸어 다닌다. _7쪽

『간단후쿠』,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단어였다. '간단후쿠'는 옥수수자루 아니면 항아리 같은 모양에 둥그스름한 구멍이 네 개 있는 옷이다. 입고 벗기 쉽도록 만든 것으로,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은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이다. 보통은 감자 껍질 빛깔의 광목천으로 만들었는데, 쉰 옥수수 냄새를 풍기며 대나무 잎보다 빳빳하다고 한다.

'간단후쿠'를 입은 소녀들은 원래 다른 곳에 가 있어야 했다. 바늘 공장도 있었고, 실 공장도 있었다. 그저 좋은 공장, 돈 많이 버는 공장으로만 알고 따라나선 곳이 만주 허허벌판에 세워진 '스즈랑'이었다. 그곳은 널빤지 하나로 방 아니 칸막이를 만든 곳이었는데, 소녀들은 밤마다 그곳에서 군표를 받고 잠을 잔다. 군인 한 명에 군표 하나. 밤새 15장의 군표를 모아서 가도 빚을 갚기에 부족하다고 한다. 빚을 갚기는커녕 매일 이자가 늘어만 간다. 소녀들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저마다 떠나온 고향으로, 가족들이 바라던 대로 돈을 벌어서 돌아갈 수 있을까?

'엄마, 나 만주 실 공장에서 아기를 낳을 거 같아요. 누구 아기인지는 묻지 마세요. 실 공장에서 번 돈은 집에 갈 때 가지고 갈게요. 답장은 마세요.' _287~288쪽

쉬이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소녀들은 어떻게 그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까? 작가는 어떻게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쓸 수 있었을까? 소녀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이것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장 한 장 읽는 게 힘들었고, 입을 틀어막고 읽을 때도 있었다.

작가 김숨은 1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이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듣는 것도, 쓰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아서, 외면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반복되는 전쟁과 폭력과 학살.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소녀들은 여전히 곳곳에 있다. 우리가 보고 있지 못하거나 보려고 하지 않을 뿐.

존엄을 회복하고 숭고한 모습으로 그 소녀들의,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되어 찾아오실 할머니들께 이 소설을 드린다. _290~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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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공범이 되는가
맥스 베이저먼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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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악한 이들이 활개를 친다!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5분. 대한민국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포고령이 발표됐다. 한편의 코미디 같았다. 그러나 웃을 수 없었다. 총을 든 계엄군이 등장했고, 요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민들이 국회로 달려가서 맨몸으로 저항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계엄이 말이 되냐며 청문회에서 비웃던 장관이 동조했다. 그는 왜 스스로 비웃었던 계엄 사태의 공모자가 되었을까?

이는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공범이 되는가』는 "2021년 1월 6일, 말도 안 되게 많은 사람이 쿠데타 시도에 가담하여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한 충격적인 사건에 감응하여 쓴 것"(10쪽)이라고 한다. 2021년 1월 6일,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미국 대선 부정 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며 연방의회의 조 바이든 당선인 인준을 방해하기 위해 의사당을 무력으로 점거하는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1,600여 명이 기소됐고 200명 이상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책에는 특정 인물(집단)이 범법 행위를 저지를 때 그들의 비위를 도운 공모자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그들이 어떤 과정이나 행위를 통해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에 가담하게 됐는지 설명한다. 앞서 소개한 트럼프 사건을 포함해 나치, 폭스바겐의 디젤게이트, 위워크의 사례가 실려있다. 특히, 우리에게도 익숙한 컨설팅그룹 맥킨지의 두 얼굴은 놀라웠다. 맥킨지가 컨설팅을 제공한 회사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들은 제안만 했을 뿐 선택은 컨설팅을 의뢰한 회사가 한 것이라며 발뺌을 하거나 서로 대립하는 두 회사의 이익을 위해 동시에 컨설팅을 제공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한국의 한 기업이 맥킨지의 컨설팅을 받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제발 윤리적인 컨설팅을 제공했기를 바란다.)

범죄가 일어나는 순간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도 911에 전화하지 않거나 가해자를 말리지 않는 등 범죄를 막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을 방관자라고 정의한다. 반면 조력자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범죄 사실을 알고도 조직 내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생존자를 돕거나 추후 동일 가해자가 또 다른 폭력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충분히 취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조력자와 방관자는 성폭력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가담하지만, 두 유형 모두 행동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 사람들은 작위에 의한 위법행위보다 부작위에 의한 위법행위를 잘 처벌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_251쪽

저자는 특히 방관자의 부작위를 범죄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경계한다. 지난 12월 3일 밤, 그저 TV로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도 달려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시민들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사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공모자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부작위로 공모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공모자들이 더 활개친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각인시켜주는 책이다. 이 두 가지를 주지하고 있다면 불의 앞에서 이전보다는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뭐라도 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아무리 소수의 사려 깊고 헌신적인 시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하더라도, 뭐라도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더 빨리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소수의 사려 깊고 헌신적인 시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의심치 마라.

실제 세상을 바꿔 온 것은 바로 그들이다. _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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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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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언어, 한 세계에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자유롭게 훨훨 유영하는 작가!

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인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가 오랫동안 절판되어 있다가 개역 증보판으로 나왔다. 2011년 처음 출간된 초판본에는 14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개역 증보판에는 9편의 글이 추가되어 '다와다 요코의 세계'를 더욱 공고하게 구축하고 있다.

196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작가는 와세다대학교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로 건너갔다. 1982년부터 현재까지 함부르크와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모어에서는 단어들이 사람과 꼭 붙어 있어서 도대체 언어에 대해 유희를 하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모어에서는 생각이 단어에 너무 꼭 들러붙어 있어서 단어나 생각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가 없다. 외국어를 쓸 때는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같은 것을 갖게 된다. 이 제거기는 서로 바짝 붙어 있는 것과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모두 떼어놓는다. _48~49쪽


모국어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작가는 두 언어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한 세계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특히, 파울 첼란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며 풀어쓴 「번역가의 문 또는 첼란이 일본어를 읽는다」는 작가처럼 이중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이야기다. 작가는 일본어로 번역된 텍스트에서 한자 '門'이 부수로 들어간 문자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독일어 텍스트와 연결시키는데, 일본어는 전혀 모르고 한자는 읽을 줄 아는 내가 보기에도 '門'을 찾아내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작가는 단어 하나조차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데, 독일어 'Ich' 역시 그중 하나다. 일본에서는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다른데, 남자아이들은 '보쿠', 여자아이들은 '아타시'라고 지칭한다. 어른들은 성 중립적인 '와타시'를 쓸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소년이나 소녀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러나 독일어는 아주 간단하게 'Ich(나)'라고 말하면 된다.


만약 내가 ─ 예를 들어 독일어 같은 ─ 다른 언어를 말했다면 내 유년 시절은 얼마나 간단했을까. 나는 아주 간단하게 그냥 "이히(ich)"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히"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느낄 필요가 없었다. _233~234쪽


최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면서 한국에서도 다와다 요코의 작품들이 여럿 발표됐다. 다와다 요코처럼 한 곳, 한 언어에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유영하며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태어날 때 고유한 원본 텍스트가 주어진다는 기본 생각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원본 텍스트가 보존되는 장소를 영혼이라고 부른다. _55쪽


나는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내 영혼은 항상 어딘가 떠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_57쪽


다른 글자와 같이 살아가는, 외국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과 노동자들도 이에 속한다. 이들의 눈에 도시의 모습은 수수께끼이거나 베일에 싸여 있다. _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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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개의 말·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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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체코문학이 다시 타오르길 바라며! 부디 사라지지 말지어다!

2023년 7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94세의 나이로 밀란 쿤데라가 별세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지만 끝끝내 수상하지 못했다. 『89개의 말ㆍ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그의 2주기에 맞춰 출간된 유고집으로, 두 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앞서 밀란 쿤데라는 에세이 『커튼』을 통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먼 나라"의 작가로 살아가는 어려움과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이 책 역시 그런 고민들이 담겨 있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만큼 "번역 문제로 몸살을 앓는 작가"(16쪽)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1968년 러시아 침공이 있기 전까지는 프라하에서 그의 작품들이 출판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체코슬로바키아(1993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해체되고 체코 공화국이 탄생했다)에서 출간될 수 없었다. 게다가 체코가 점점 더 러시아 지배권역의 변방으로 전락함에 따라 체코어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외국의 많은 출판사에서는 프랑스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번역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원칙적으로는 거절했지만, "그들 나라에 체코어 번역자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17쪽) 이것이 그의 고민이었고, 이런 이유로 잡지에 발표하는 글과 평론은 프랑스어로 직접 쓰기 시작했다.

『농담』은 1968년과 1969년에 서구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슬플 수가. 프랑스에서는 번역가가 나의 문체를 완전히 바꿔 소설을 거의 다시 쓰다시피 했다. 영국에서는 편집자가 내적 성찰이 이어지는 모든 단락을 짧게 자르고, 음악학적인 장들을 없애 버리고, 부部들의 순서를 바꾸어 소설을 재구성했다. 또 다른 어느 나라. 번역자를 만나 보니, 그는 체코어를 단 한 마디도 모른다. "번역을 어떻게 하셨나요?" 나의 물음에 그가 "마음으로요."라고 대답하며, 지갑에서 내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그의 태도가 너무도 호의적이어서 나는 마음의 텔레파시로 번역하는 게 진짜 가능한 줄로 믿을 뻔했다. (…) 아르헨티나 번역자가 그랬듯이, 그도 프랑스어판 '다시 쓰기' 판본을 번역한 것이었다. _13쪽

하지만 밀란 쿤데라는 이내 깨닫는다. 사유를 하는 것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소설까지 프랑스어로 쓰지는 못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어 판본을 온전히 그의 텍스트로 여길 수도 없었다. 「89개의 말」은 밀란 쿤데라의 고민을 알고 있었던 피에르 노라(1980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지식층을 상대로 한 격월간지 《데바》 창간)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참고로 이 개인 사전의 일부는 에세이 『소설의 기술』 한 부部(6부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에도 실려 있다.

"그 모든 번역본을 검토할 때,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 깊이 숙고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렇다면 자네의 개인 사전을 써보면 어떻겠나? 자네가 중요시하는 말들, 자네를 골치 아프게 하는 말들, 자네가 애착하는 말들을 모은……?"(18쪽)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에는 "서구 운명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중심인 프라하가 자신이 한 번도 속한 적이 없는 동유럽의 안개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97쪽)는 것을 보며 느낀 작가의 고뇌가 담겨 있다. 그는 "체코의 언어, 외국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체코어가 아주 오래전부터 프라하와 다른 유럽 사이에 불투명한 유리창처럼 가로놓여 있다"(98쪽)고 말한다.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토로한 적이 있는 고민이라 작가의 안타까움이 더더욱 와닿는다.

소국들의 유럽은 다른 유럽이며, 다른 시선을 가지며, 그 사상은 종종 대국들의 유럽과 완전한 대위를 이루기도 한다. _99쪽

1914년 세계 대전 직후, 유럽 문학이 미래에 대한 찬란한 비전과 혁명의 종말론에 매혹되는 경향을 보일 때, 이들 프라하 출신 작가들은 진보의 숨겨진 얼굴, 위협적이고 병적인 그 검은 얼굴을 누구보다도 먼저 꿰뚫어 보았다. (…) 언제나 사건의 주체라기보다 대상이었던 소국들과 소수파들인 이 다른 유럽이 가진 환상 없는 시건이 그것이다. 여러 민족들에 둘러싸여 고뇌에 찬 고독을 경험한 유대인 소수파의 시선(카프카), 그 정치와 전쟁이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오스트리아 제국에 병합된 체코 소수파의 시선(하셰크), 자신들에겐 의견조차 묻지 않고 다음 재앙을 향해 달려가는 유럽 강대국들 한가운데서 소수파로 남은 신생 체코 국가의 시선(차페크) 등. _104~105쪽

1968년의 러시아의 침공은 60년대 세대 전체를 쓸어내 버렸고, 더불어 그 이전의 현대 문화 전체를 쓸어내버렸다. 우리의 책들은 프란츠 카프카나 체코 초현실주의자들의 책들과 같은 지하실에 갇혀 있다. 죽은 자가 된 산 자들과 두 번 죽은 자가 된 죽은 자들이 나란히 갇혀있다.

이제는 사람들이 알까. 프라하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단지 인권과 민주주의와 정의 등등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거기에서, 하나의 위대한 문화 전체가 불타고 있다는 것을,

시가 사라져 가는,

불길에 휩싸인 종잇장처럼. _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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