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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평점 :
우리는 누구나 트라우마 상황에 노출돼 있다!
최근 트라우마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 전체가 트라우마에 빠져 있다고도 한다. 트라우마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 PTSD)로 전쟁, 대참사, 재난 같은 '일반적인 인간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외상 사건을 경험한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장애(p.30)를 말한다. 그러나 여성이나 아동의 경우 가정폭력, 학대, 성폭행처럼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당사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충격이 되므로, 최근에는 외상 사건을 '일반적인 적응 능력을 압도하는 특별한 사건'(p.30)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렇게 정의해 놓고 보면, 우리는 늘 트라우마를 겪을 상황에 노출돼 있다. 아직까지도 최악의 지하철 사고로 기억되고 있는 대구지하철참사, 수 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삼풍백화점 사건, 어린 학생들이 많이 희생된 성수대교 붕괴 사건 등 대참사뿐만이 아니라 빈번하게 발생하는 자동차 사고, 성폭행, 학교폭력, 아동학대 등도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나의 트라우마
나 또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어릴적 부모님이 여행가시고 동생과 둘이 잠든 날, 부부 싸움하던 옆집 아저씨가 홧김에 불을 질렀다. 어떤 큰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천장에서 불꽃이 떨어지는 걸 보고는 동생을 깨워 얼른 뛰쳐 나갔다.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라 했지만, 2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날 밤의 악몽이 나를 따라다닐 줄은 몰랐다.
난 밤이 되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심장이 팔딱팔딱 뛰고, 자다가 놀라서 일어나면 다시 잠을 잘 수가 없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이 방문 닫는 소리나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 혹은 비가 내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돼도 심장 박동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책조차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돼서 집중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그저 잘 놀라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이 되면 불안감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선풍기가 과열돼서 불이 나면 어쩌나,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창문이라도 깨지면, 혹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 등 침대에 누웠다가도 몇 번씩 다시 일어나 집안을 확인하고서야 잠이 든다.
만약 내가 사고로 죽게되더라도 절대 화재로는 죽지 않을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렴풋이 어릴적 화재 사고가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됐나보다 여겼다. 그 충격의 실체가 궁금해서 몇 번 치료를 받아볼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알게 됐다. 그건 나의 트라우마였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정면 승부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소개하며, 트라우마의 정의와 원인, 증상, 극복방법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외부 자극을 받으면 그것이 위험한 것인지 아닌지를 평가해서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매우 위협적이고 위험한 자극이 들어오게 되면 자극을 찬찬히 평가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이 오로지 응급으로 빠르게 반응하는 시스템만 작동하게 된다. 이것은 살아남기 위한 적응적인 반응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위험한 상황이 끝나고 난 뒤에도 이러한 시스템의 변화가 그대로 지속된다는 것이다. (p.45)
이 상태는 《여자, 정혜》의 정혜처럼 꾸준히 지속될 수도 있고, 람보처럼 그 사건을 상기시키는 어떤 요인으로 인해 촉발될 수도 있다. 이것을 촉발 인자, 트리거라고 한다. 또, 그 사건이 발생한 특정 시간이 되면 증폭되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밤에 자다가 어떤 소리를 들은 후 화재가 났기 때문에 밤마다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못 이루는 것이다.
이 트라우마의 고통을 극복하려면 정면 승부를 해야 한다. 혼자서 어렵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의 의지다. 아직 마음을 열 준비가 돼 있지도 않은데, 외부에서 억지로 트라우마를 들춰내고 치료하려고 하면 안된다. 강력한 트라우마를 받은 환자에게는 마음의 방어벽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굿 윌 헌팅》에서 맥과이어 교수는 자신도 윌 헌팅과 같은 상처가 있었노라며 먼저 말해준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윤수는 유정 또한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자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연다. 무엇보다 교감이 중요한 것이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환자들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특히,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은 자기의 행동이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며 자학한다. 또, 주변 시선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유정의 엄마는 성폭행을 당한 유정을 차갑게 대한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면, 트라우마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당사자의 잘못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는 아이큐가 고작 75였고 다리마저 불편해서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다. 그런 친구들로부터 달아나면서 다리는 불편하지만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장점인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으로 대학까지 가게 된다. 포레스트는 단점이 많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장점을 살렸다. 그것이 바로 긍정의 힘인 것이다.
"나는 하느님이 주신 세 가지 은혜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 집이 몹시 가난해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둘째,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몹시 약해 항상 운동에 힘써왔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셋째,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p.236)
우리나라 기업인들에게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한 말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가 아닌 그 '덕분'으로 매사에 임하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도 필요하다.
이 책에는 트라우마 지수 체크 리스트가 있어서 자가 진단을 할 수도 있다. 트라우마는 특정한 사람들만 겪고 있는 장애가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노출돼 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거나 트라우마가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09-94.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2009/07/19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