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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평점 :
우리가 얻은 민주주의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뤄야 온전히 누릴 수 있을까?
정치인은 잘나거나 못나거나 도토리 키재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딱히 지지하는 정당도 정치인도 없다. 유시민 교수*가 대구에서 출마했을 때 회사가 그곳에 있어서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또 대구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대학생은 아니지만 그의 강의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두 달 전, 맬서스의 『인구론』을 가지고 보수와 진보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었다. 사실 맬서스의 『인구론』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고전이지만 누구나 읽을 수 없는 고전이기도 하다. 유시민 교수는 맬서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수와 진보에 적용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아주 명쾌한 강의였다.
(* 당시 강의에서도 유시민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대한 말이 많았다. 우리나라는 한번 관직에 오르면 그렇게 부르는 습성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혹은 전 의원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 유시민씨라고 부르는 학생이 있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현재 그의 직업은 경북대학교 시간강사이니, 유시민 교수로 부르겠다.)
나는 지식소매상이라는 직업에 대해 제법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맛있는 음식으로 많은 고객들의 입을 즐겁게 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 맛집 주인처럼, 나도 재미있거나 유용한 지식을 많은 독자들과 나누어 가지는 데서 행복을 얻는다. (p.358)
유시민 교수는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 부른다. 무언가에 대해 직접 연구하고 이론을 펼치는 사람도 훌륭하지만, 누군가의 이론을 알기 쉽게 풀이해주는 사람도 대단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그가 낸 『후불제 민주주의』는 우리 헌법에 대한 이야기다. 헌법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어려워서 지레 겁을 먹기 마련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헌법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고민하지 않고 바로 선택하게 됐다.
대한민국은 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민주공화국이었다. 어떤 나라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고 왕의 목을 잘랐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한적이 없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일본이 패망하면서 우리는 우연찮게 그것을 얻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반만년 동안 왕이 통치하던 나라였다. 얼떨결에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누리며 살아야 하는지를 몰랐다.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예전처럼 왕이 되려했고, 국민 또한 대통령을 나라의 아버지로 여기며 모든 것을 맡기려 했다. 결국 과거의 왕처럼 군림하려는 자가 나타났고, 그제서야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알게 됐고 다시 찾으려 했다. 그때부터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후불제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1부 헌법의 당위"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을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국민들의 기본권도 함께 보장하고 있다. 이것 또한 어떠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은 '후불제 헌법'이다. 그래서 국가는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헌법 전문을 제대로 읽어본 이가 드물다.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니 해석 또한 잘못할 수 밖에. 그는 1부에서 헌법 조항을 소개하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국민들이 누려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짚어주고 있다.
"2부 권력의 실재"에서는 몇 년 동안 정치 및 공직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과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10년 전 처음 이 책을 기획했을 때는 헌법 판례를 소개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그 사이 정치를 하면서 직접 경험한 것도 생기고, 헌법을 적용하는 상황도 많이 바뀌어서 원래의 기획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 2부에는 그의 정치적인 견해가 담겨 있다. 어떻게 보면 자신과 노무현 정부에 대한 변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애정도 있고, 비판도 함께 있다. 그는 이런 성향 때문에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서 미움을 받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정치적인 견해가 담긴 2부보다는 1부가 훨씬 유익했다.
그들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수배했을 때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시민단체 회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모차 엄마를 기소했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전교조를 압수수색했을 때 /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 / 나는 방관했다 /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을 잡으러 왔을 때는 / 나와 함께 항의해줄 /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은 독일 시인 니묄러가 썼다고 알려진 시를 바꾼 것이다. 유시민 교수는 원래부터 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선한 사람도 악한 상황과 악한 시스템을 만나면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그저 넋놓고 있다가는 우리가 얻은 선한 시스템인 민주주의를 놓쳐 버리는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얻은 민주주의를 온전히 누리려면 우리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뤄야 할까.
09-91. 『후불제 민주주의』 2009/07/12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