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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 그녀의 작품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여러 출판사를 통해 앞다퉈 출간되고 있다. 내가 그녀를 만난지 불과 1년만에 그녀의 작품들이 결국 나의 책장 한켠을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왠지 그녀답지 않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항상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호텔 정원처럼 탁 트인 공간에서는 그런 은밀하고 스멀스멀한 공포가 생길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거울의 방' 같은 이야기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은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여 있어서 거울 속에 거울이 있고, 또 그 거울 속에 거울이 있고... 끊임없이 안으로 들어가도 거울이 존재한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면서 마치 '거울의 방'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신 거울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야기가 존재한다.
읽지 않은 분량보다 읽은 분량이 더 많아질 때까지도 이야기의 구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번씩 머리 속으로 상황을 그려보고 나서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좌절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크게 '호텔 정원에서', '나그네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의 세 가지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세가지 이야기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호소부치는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이라는 각본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고, 어떻게 결말을 써야할지 고민이 돼서 평소 남들과 다른 명쾌한 두뇌로 조언을 주었던 구스노키에게 자문을 구한다.
호소부치의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고백>이라는 일인극을 준비하던 가미야라는 각본가가 <고백>의 주인공을 발표하기 전날 호텔 정원에서 열린 파티에서 독살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얼마 후 가미야가 죽은 호텔 정원에서 <고백>의 주인공 후보였던 두 여배우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여배우가 독살을 당하고 만다.
각본가 가미야가 준비하고 있던 <고백>은 세 명의 여배우와 형사가 등장한다.
각본가 가미야가 <고백>의 주인공을 발표하기 직전 죽게되자, 세 명의 주인공 후보가 용의자 선상에 오르게 된다. 일인극 <고백>의 주인공이 되려면 각본가 가미야가 제공한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큰 틀을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자의 여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각색을 해서 오디션에 참가해야만 했다. 여배우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을 연극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가미야가 워낙 대단한 각본가였기 때문에 그녀들은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고백>은 한 여배우를 협박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오디션을 통해 주인공을 뽑는다고는 했지만 사실 주인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형사는 <고백>을 자신 앞에서 연기해 보라고 여배우들에게 주문한다. 오랫동안 형사 일을 해오면서 거짓말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온 그는 범인이 하는 거짓말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한 명의 여배우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사건이 종결된 후 우연히 범행 장소를 다시 찾아가게 된 형사는 그녀가 가미야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그녀는 오랫동안 가미야를 사랑해 왔다. 그러나 가미야는 그녀를 한번도 돌아봐주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보다 어린 여배우와 재혼을 해버렸다. 우연히 가미야의 집을 방문하게 된 그녀는 가미야가 어이없는 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고사와 가미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를 사랑해왔던 그녀의 사랑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그를 죽인 범인을 연기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죽인 여자.
그렇게 되는 것이 당신이 바라는 바였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이 누구보다 깊이 사랑한 그 사람을, 마지막까지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 여의치 않았던 그를, 가장 마지막에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를 연기해 온 것입니다. (p.339)
'나그네들'은 가장 온다 리쿠다운 이야기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마치 스멀스멀한 공포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어두운 밤, 두 남자가 선로를 따라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예전에는 기차역이었지만 지금은 극장으로 개조되어 연극 무대로 바뀐 곳을 찾고 있다. 나이든 남자와 젊은 남자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걷고 있다. 그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연극과 관련된 괴기스러운 이야기, 한 호텔 정원에서 죽은 젊은 여자의 이야기, 새 아버지의 양녀를 좋아했던 남자의 이야기 등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물음표가 남는 이야기들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의 경계
이렇게 마구 섞여 정리가 되지 않았던 이야기들은 결국 호소부치의 각본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로 정리가 된다. 그리고 비로소 온다 리쿠의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의 혼란스러움도 정리가 되고,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독자들이 실재(實在)라고 믿게 하기 위해 가상의 책을 만들어 인용하곤 한다. 어느 책에서 인용했다는 것까지 나와있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독자들은 당연히 실재(實在)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국 그 책마저 그가 가상으로 만들어 낸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난 혼란이 찾아온다. 과연 어디까지가 실재(實在)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에 대한 경계를 알 수 없어서 생기는 혼란이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면서 나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읽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존재하고, 또다른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또 존재하는 이야기의 연속. 『삼월은 붉은 구렁을』처럼 이야기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온다 리쿠, 그녀는 독자들에게 쉽게 읽혀지는 이야기가 아닌 이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택했던 것일까.
그것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있는 호텔 정원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호텔 정원'이라는 공간은 그리 은밀한 곳이 되지 못한다. 호텔 정원은 탁 트여져 있는 공간으로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 쉬운 곳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도 나를 관찰하기 쉬운 곳이다. 즉 내가 관객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연기를 볼 수 있기도 하지만, 내가 배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나의 연기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녀는 경계가 없는 현실과 허구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역시 무대와 현실은 동전의 앞뒤. 보잘 것 없는 허구라도 현실의 일부. 항상 시대와 함께 나란히 달리는, 그것이 연극이지. (p. 116)
2007/07/28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