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의 판도라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4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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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불행이 뒤섞인 콩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들녁출판사의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시리즈는 21세기 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영어권, 프랑스어권, 독일어권, 스페인어권을 포함한 다양한 나라의 최신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차가운 피부』로 시리즈의 첫번째를 장식했던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이 아프리카 콩고를 배경으로 한 『콩고의 판도라』를 내놓았다. 인류의 불행과 희망의 시작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유명한 판도라, 콩고에는 어떤 판도라가 숨어 있을까.

   주인공이자 화자인 토머스 톰슨은 대필 작가다. 그는 프랭크의 대필 작가였지만, 프랭크는 누군가의 대필 작가였으며, 그 누군가는 스펜서의 대필 작가였고, 스펜서는 프랭크 스트럽의 대필 작가였다. 프랭크 스트럽은 위대한 작가 플래그 박사의 대필 작가로, 결국 먹이사슬의 꼭대기에는 플래그 박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필 작가의 존재는 모른채, 또 대필 작가의 또다른 대필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채 플래그 박사의 소설을 끊임없이 칭찬한다. 어느날, 우연한 사고로 토머스 톰슨을 제외한 모든 대필 작가들이 죽게 된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플래그 박사에게 궁극의 대필 작가는 자신이라고 말하려다 오히려 무시만 당한다. 이런 그를 관심있게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야심찬 변호사 노튼은 톰슨에게 자신이 변호를 맡고 있는 살인자 마커스 가비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써달라고 한다.
   모시고 있던 주인 형제를 죽이고 다이아몬드를 훔친 죄로 기소된 마커스 가비, 톰슨은 교도소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써내려 간다. 마커스 가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가 그동안 대필로 써줬던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환상적이다. 마커스 가비는 자신이 주인 형제를 죽이지 않았으며 주인 형제가 어떻게 죽게 됐는지, 그가 어떻게 다이아몬드를 얻게 됐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환상적인 모험을 들려준다. 또, 이야기 속에는 백인들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면서 아프리카 흑인 또는 원주민들을 상대로 얼마나 잔인한 행동들을 했는지도 보여준다. 백인들은 그들을 단지 다이아몬드를 채집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다. 그랬다. 미지의 세계 콩고는 희망과 악이 서로 뒤엉킨 '판도라'가 된 것이다.
   톰슨이 써낸 마커스 가비의 이야기는 큰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마커스 가비의 무죄를 소리 높여 외쳤다. 결국 변호사 노튼이 바란대로 가비는 석방됐다. 이게 바로 문학의 힘이다. 변호사인 노튼은 할 수 없었지만, 작가인 톰슨은 가비의 석방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톰슨은 앞서 여러 대필작가에게 속았듯이 노튼에게도 속았다. 마커스 가비가 들려준 이야기는 노튼이 플래그 박사의 소설을 바탕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다. 마커스 가비는 톰슨이 그려낸 것처럼 이 세상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모시고 있던 주인 형제를 죽인 살인마에 불과했다.

"톰슨, 문학과 문학산업은 처음엔 활자가 오고가고, 다음에는 숫자가 오가는 거야." (p.500)


   소설은 숨가쁘게 읽혀진다. 추리소설과 판타지소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다음 장을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책을 내려 놓을 수가 없다. '책 속의 책' 형태의 구성도 흥미롭고, 현실과 이야기 속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구조도 재밌다. 또, 단순히 재미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고민과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고찰도 함께 담고 있어 생각할거리도 던져준다.
   영미소설이나 일본소설, 혹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 독자라면,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시리즈를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소설의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콩고에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되었다. 그 전투보다 더 큰 대량학살을, 그것도 유럽 한복판에서 자행된 학살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콩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콩고는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p.353)


09-81. 『콩고의 판도라』 2009/07/06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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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 설월화雪月花 살인 게임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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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성 짙은 추리소설!
   추리소설은 장점이자 단점은 중독성이 짙다는 것이다. 한번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하며 절대 한 권으로 끝나는 일이 없다.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거나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도 읽어야 한다. 
   얼마전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가 현대문학을 통해 한꺼번에 네 권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는 캐릭터 사용을 절제해 왔는데, 가가 형사는 그가 20년 동안 공들여 키워온 캐릭터라고 한다.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졸업』을 시작으로 『잠자는 숲』, 『악의』,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내가 그를 죽였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붉은 손가락』 등 모두 7권이다. 
   이 중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책은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였다. 아무래도 가가 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졸업』을 먼저 읽어야 순서가 맞겠지만, 어차피 출간 순서도 뒤죽박죽이니 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먼저 골라 읽었던 것이다. 끝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재밌었고, 주인공은 아니지만 이따금 등장해 놀라운 추리력을 선보이는 가가 형사가 궁금했다. 그래서 결국 그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졸업』을 읽게 된 것이다.  

언제라도 진실이라는 건 볼품없는 것이다!
   『졸업』에는 대학교 졸업반인 가가 교이치로와 그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가가, 사토코, 나미카, 도도, 쇼코, 와코, 하나에는 모두 고교 시절부터 친구로 대학도 같은 곳을 다니고 있다. 이 중에는 연인 사이도 있고, 같은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망설임 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쇼코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쇼코의 자살을 믿을 수가 없었고, 그녀가 자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러다가 타살일 수도 있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추적에 나선다. 그러던 중 또 한명의 친구인 나미카가 '설월화'라는 다도 게임 중 독극물 중독으로 죽게 된다. 나미카가 스스로 독극물을 넣지 않았다면, 범인은 게임에 함께 한 친구들 중 한명이다. 
   당시 가가 교이치로는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하다가 경찰 대신 교사가 되기로 맘 먹었다. 형사인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친구의 죽음 이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다. 어쩌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사인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 받았는지도 모른다. 형사보다 사건의 비밀을 먼저 풀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파헤치고 있는 그에게 고교 은사였던 미나미사와 선생님은 "언제라도 진실이라는 건 볼품없는 것이야. 그건 그리 대단한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단다"(p.320)라고 말한다. 가가는 친구를 죽인 범인을 잡으려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미나미사와 선생님의 말처럼 그들이 죽은 이유가 밟혀졌을 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그리 거창한 것이 못 됐다. 졸업을 앞두고, 사회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순간에, 그들의 우정은 그렇게 끝이 나버린다.

   『졸업』에서 가가 교이치로는 이제 막 추리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가 교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형사로 나서는 이유는 『악의』에서 밟혀진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 아무래도 올 여름은 가가 교이치로의 행적을 따라가 봐야겠다.

09-88. 『졸업』 2009/07/05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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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내 꿈아
박문성 지음 / 여우볕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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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재능은 과신 말고, 자신의 노력은 신뢰해야 한다!  

   학창시절, 내게는 뚜렷한 꿈이 없었다. 여느 아이들이 그러듯이 그때 그때 좋아보이는 것이 내 꿈이 됐다. 뚜렷한 꿈이 없었다는 것은 뚜렷한 목표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오랜 시간을 목표없이 방황하다가 대학교 졸업반이 돼서야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축구 전문기자. 아주 어릴적부터 축구가 좋아 쫓아다녔고, 내 전공은 신문방송이었다. 좋아하는 것과 배우고 있는 것을 짜맞춘 꿈이었다. 그러나 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그 꿈을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축구장을 쫓아다니고 있다는 것뿐. 
   졸업 후 몇 년이 지났고, 한참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축구 전문기자를 해보지 않겠냐는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이미 그 꿈을 잊어버린지는 오래였고, 일 때문에 오랫동안 축구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섰다. 이제서야 내 삶의 물꼬가 트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즌 개막 1주일을 앞두고 축구 전문기자로 합류했다. 마감을 넘기고 내가 만든 잡지가 나오자마자였다. 당연히 그동안의 공백을 메울 준비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축구장 한번 가보지 않은 기자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않냐는 말도 힘이 되지 않았고, 나보다 축구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어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3월이라지만 아직은 차가운 바람에 1주일 내내 서 있었으니 몸이 먼저 무너질 수 밖에. 
   그렇게 나는 스스로 내 꿈에게 안녕을 고했다. 뚜렷하게 목표 한번 세운적 없었고, 그래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이내 다른 길을 택한 나는 내 꿈이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그것을 움켜 잡을 수가 없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러나 후회를 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다. 어차피 좋아서 쫓아다녔을 뿐 그것을 위해 들인 노력은 없으니까.

   꿈은 선명한 목표의식이다. 또 꿈은 목적지를 표시하는 좌표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선 반드시 좌표가 필요하다. 꿈이 없다는 건 목적지가 없다는 말과 같다. 삶의 여정, 그 출발은 바로 꿈이다. (p.16)

미리 한계를 긋지 마라! 그 무엇도 틀에 가둘 순 없다!  

   박문성, 축구 중계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의 얼굴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다. 축구해설가 하면 보통은 은퇴한 감독이나 선수, 나이든 해설가가 맡기 마련인데 그는 젊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축구매거진인 베스트일레븐에서 글을 쓰는 기자였다. 그런 그에게 축구해설가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기자였다. 당연히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축구해설가를 해낼 수 있을만큼 충분한 준비가 돼 있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쥐었다. 덕분에 축구 전문기자로, 칼럼리스트로, 축구해설가로 맹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축구 팬에서 축구 전문기자로, 또 축구해설가로 활약하고 있는 그가 참 운좋은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사랑한다 내 꿈아』에는 자신의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노력이 담겨 있다. 또 그의 꿈만이 아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있다. 특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던 선수들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비록 그것이 흔해빠진 감동 스토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불안은 조급함을 낳는다. 서두르면 미래를 차분히 그릴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곤 한다. 우리가 불안하고 조급한 건 이성이 아닌 마음이 이미 그렇게 정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미치도록 바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일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일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도전과 쉼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더 큰 아름다운 도전을 위한 삶의 지혜인지 모른다. 분주함과 초조함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한발 떨어져 호흡을 가다듬는 느림이 소중한 오늘이다. (p.237)

   그와 나를 비교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둘 다 같은 것을 좋아했고 같은 꿈을 꿨다. 그리고 한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뤘고, 나는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꿈과 자신을 믿으며 끊임없이 준비했지만, 나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해하며 이내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꿈이 없는 시대라고 했다. 꿈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꿈조차 꾸지 못한다면 더이상의 희망은 없다. 꿈조차 제대로 갖지 못해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09-89. 『사랑한다 내 꿈아』 2009/07/05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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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 디자인, 디자이닝, 디자이너의 보이지 않는 세계
홍동원 지음 / 동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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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원이 이야기하는 우리 디자인은, 눈물겹다!
   톡톡 튀는 제목의 책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걱정을 하게 된다. 제목만큼 톡톡 튀는 책이면 어떡하지? 물론 톡톡 튀면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다만, 독특함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읽을거리를 빼먹는 책들이 있다는게 문제다. 특히 이런 문제는 광고나 디자인 관련 책들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이건 책이 아니라 카탈로그 혹은 전단지를 보는 기분이다.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걱정스러운 마음에 책을 들자마자 책장을 휘리릭 넘겨본다. 일단, 텍스트와 그림이 적절히 사용됐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럼,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홍동원, 그는 출판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아트디렉터다. 출판디자인, 즉 편집디자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충 이미지를 짜맞춰서 명함을 만들고 전단지를 만드는 사람쯤으로 여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대다수의 편집디자이너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작업물을 내놓아야 한다. 작업량은 많고, 새로운 디자인을 생각해 낼 시간이나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작업물에 이름과 사진만 바꿔 내놓을 수 밖에 없다. 그는 이런 열악한 편집디자인의 세계에서 이름을 얻은 몇 안되는 아트디렉터다. 
   그는 "노느니 글을 쓰자"고 맘 먹었다. 그의 스승은 '꼭 글을 쓸 줄 아는 디자이너가 되라'(p.9)가 되라고 그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월간 《디자인》에 6년째 자신의 글을 싣고 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그는 벌써 6년째 글을 쓰고 있다. 나름의 글쓰기 철학도 있다. 보이는 것처럼 쉽게 쓰자! 그의 전공 분야인 편집디자인과 관련해 전문적인 이야기를 썼다면, 한때 편집디자인 좀 해봤다는 나도 아마 지루해 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독자들의 눈높이를 간파했으리라.
   그는 편집디자인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자신의 디자인 철학과 함께 풀어 놓는다. 혹시 과거 검찰 로고를 기억하는가? 나는 몇 년 전에 바뀐 로고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이 로고를 그가 만들었다. 당시 검찰 담당자가 그에게 친절하고 예뻐 보이는 명함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찰리 채플린의 콧수염을 본따 디자인했단다. 처음 검찰청에 들어갈 때 바짝 쫄아있던 그가 '수호천사 같은 명함'을 만들어 건네면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담당 검사도 감동했다.

   경찰의 포돌이를 보자. 포돌이가 친절한 경찰의 상징인지는 몰라도 그런다고 노래방 주인에게 '삥'이나 뜯고, 범인과 짜고 뒷돈 챙기고 풀어 준다면 포돌이가 어떻게 친절해 보이겠냐. 그러니까 쓸데없이 웃기는 캐릭터 만들지 말고 검찰 서류나 간판 그리고 모든 시각적인 디자인 요소들에서 권위적인 요소를 일단 빼자. 그리고 부드러운 정도로 만족하자. (p22)

   또 그는 좋은 디자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밀튼이 만든 'I ♥ NY'은 뉴요커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아는 디자인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디자인이 있었다. 바로 2002월드컵 때 전국민들이 입고 다녔던 빨간 티셔츠 'Be the Reds!'.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좋은 디자인은 흔치 않다. 
   사람들은 외국의 멋진 디자인을 따라하기 바쁘다. 디자이너도 그렇고, 클라이언트들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자료 조사만 해도 좋은 디자인을 얻을 수 있는데, 클라이언트들은 촉박한 기한을 주고 디자이너들을 닦달하기만 한다. 이런게 바로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그리려면 충분히 관찰해야 하는데 날아가는 비둘기의 똥구멍을 어떻게 보고 그리겠는가.   그는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우수 사례를 무작정 따라하기보다는 우리만의 디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신화 속 캐릭터를 살려내야 하고, 우리만의 글꼴을 만들어야 하며, 서울의 풍경을 만들어야 한단다.
   한편, 윈도우즈에 세 들어사는 '한글' 이야기는 안타까움을 쏟아내게 했다. 우리에게는 '한글'이라는 막강한 워드 프로세서가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윈도우즈에 세 들어 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나면 방을 빼야한다. 안타깝게도 윈도우즈는 MS 오피스 패키지를 끼워 팔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우리글이 예쁘게 보이는 '한글'이 있음에도 말이다. 문제는 윈도우즈라는 거대 기업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 사용자들은 프로그램은 돈 주고 사면 안되는 것으로 안다. 아무리 가격을 낮춰 팔아도 절대 돈 주고 사지 않는 것이 프로그램이다. 그러니 '한글'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는 디자인 현장에서 느꼈던 점, 그의 디자인 철학, 디자인 역사와 좋은 디자인의 조건 등 디자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때론 유쾌하게, 또 때론 울분을 토하면서 이야기한다. 이 책은 그저 한 사람의 디자이너가 자신만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09-86.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2009/07/04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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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샘깊은 오늘고전 10
방현희 지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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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맛깔나는 고전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사회 교과서에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접했다. 얼마나 중요한 책이면 교과서에까지 등장할까.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샀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책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이런 내용의 책도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은 했지만, 그날 이후로도 나의 고전 탐독은 멈추지 않았다.
   최부, 무엇보다 우리 역사를 좋아했던 나는 그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그가 남긴 『표해록』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국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걸까, 아니면 내 기억에만 없는걸까. 이쯤되면, 양심 선언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고전'이라는 말만 들으면 내용 불문하고 무조건 읽어버렸던 내가 우리 고전은 멀리했다. 아니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유명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이제서야 읽고 있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김탁환의 소설을 통해 맛봤다. 그러니 기억에 없을 수 밖에. 남의 나라 고전은 줄줄이 외고 다니면서 정작 우리 것에는 어렵고 지루하다며 등 돌리고 있었던 내 자신을 반성해 본다. 

   『표해록(漂海錄)』은, 제목 그대로 '바다에서 표류한 일에 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최부는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돼 제주로 파견된다. 그러나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인 나주로 돌아가다가 기상 악화로 표류하게 된다. 최부가 탄 배는 파도에 밀려 중국 남부의 해안까지 떠내려 간다. 당시 조선에서 북경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북경 아래 지역인 강남 일대에는 드나드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최부 일행을 발견한 중국 사람들은 그들을 왜적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최부는 자신이 조선의 선비임을 입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바다에서 표류하면서 해적을 만나기도 하고, 왜적으로 오인받아 목숨이 위태롭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최부 일행은 북경에 당도한다. 중국 황제는 그들이 정식 사신단은 아니었지만 조선으로부터 온 손님이기 때문에 선물을 하사한다. 선물을 받으면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하는데, 상복을 입고 황제를 만나는 것은 중국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부친상을 당한 최부가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는 것 또한 조선의 예에 어긋나는 일이다. 최부는 예를 거론하며 끝까지 상복을 고수하려고 한다. 이 상황을 보고 최부가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괜히 고집을 피운다고 해야할까. 조선시대 때는 이 상복 때문에 그 유명한 '예송논쟁'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당시 시대를 비춰 본다면 충분히 최부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다가 중국 황제의 노여움을 사 귀국이 늦어지거나 못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효가 아닌가. 중국 땅에 왔으니 중국 법을 따르라는 중국 관리의 말에 다행히 최부는 융통성을 발휘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지나온 길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던 곳이다. 그래서 그 여정을 담은 이 기록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견문을 정리해 올리라는 성종의 명에 따라 자신의 여정을 자세히 기록한다. 또, 중국 사람이 수차로 물을 푸는 것을 보고 그 제작법을 익히기까지 한다. 

우리 고전 읽기, 어렵고 지루하다면 청소년을 위한 고전부터 시작하라!
   『표해록』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세계 3대 중국 견문록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기행문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나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비하면 덜 힘들고 간결한 기행이다. 알마에서 나온 『표해록』은 '청소년을 위한 고전'이다. 어쩌면 우리 청소년들이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펴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에는 완역판에 도전해 봐야겠다. 그때는 우리 고전의 참 맛을 볼 수 있겠지.

09-83. 『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2009/07/01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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